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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 속의 연약│벨라바넷

____1029 2020. 3. 30. 00:06

나는 이제 어여쁘기만 한 건 싫어.
들불 속을 맨발로 달리는 여자가 되고 싶어, 잔인한 바람과 칼날처럼 핏줄을 저미는 공포를 느끼고 싶어.
내게도 분노가 있어, 여과 없는 화火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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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3. 24

KPC │벨라 페터스
PC │ 바네사 라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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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 속의 연약
 
2020.03.24
 
W. 헤르츠
 
KPC. 벨라 페터스
 
PC. 바네사 라르셀
 
0. 서막
 
늦은 밤,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황궁입니다.
 
모두 잠든 시각이라 드문드문 순찰하는 근위병들, 늦게까지 일하는 주방 하인 등을 제외하면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죠.
 
최근 황후는 잠들었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고, 자주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을 부리거나 공식 석상에 나가기를 거절하는 등 굉장히 날카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럴 법도 하죠. 한 때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서 제국의 실권을 휘두르던 그녀였는 걸요. 지금의 냉대가 적응하기 어려울 법도 합니다.
 
황후는 그리 대단치 못한 가문의 여식이었죠. 그런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황제가 그 분을 몹시 아꼈던 덕분입니다.
 
한때는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속삭이는 음성과 사근한 눈짓 한 번이면 황제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줄 듯 구셨지요.
 
그래요, 삿된 아름다움에 홀려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비록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긴 했지만…
 
아무튼,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니면 또 새로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 새 정부를 들인 이후로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를 찾던 발길을 뚝 끊었습니다.
 
이제와 충신들의 간언에 귀기울일 마음이 드셨던 걸까요.
 
어느 이들은 그 사실에 몹시도 기뻐하며 황후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더니, 이젠 끈 떨어진 연 신세로군!"
 
맞습니다. 맞아요. 아무리 뜨거웠던 총애라도 언젠가는 식어 버리죠.
 
모름지기 사람 마음은 다 변하기 마련입니다.
 
온 나라의 권력이 그 고운 손아귀에 있었건만, 이제 그 시절은 과거의 망령으로 전락했지요.
 
이 구중에 갇혀 무시당한 것도 벌써 몇 년, 황후로서 무도회 등에 나서더라도 벽의 꽃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지 오래입니다.
 
물론 한낱 꽃보다야 몇 배는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어쩌겠어요? 더이상 폐하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을요.
 
모두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스쳐 지나갈 따름입니다.
 
한동안 궁 안에 틀어박혀 드문불출하시던 황후께서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겠다고 언질을 주셨습니다.
 
줄줄이 따라붙으려는 시녀들을 모두 물리시고는, 오직 당신만 데리고서 한 밤의 정원으로 향합니다.
 
벨라 페터스:……
 
어쩐지 간만에 뵙는 얼굴인 것 같군요.
 
벨라 페터스:날이 좋구나.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어. (담담하게 질문하며 빙글 웃었다.) 그렇지 않니?
 
몸을 숙여 가만히 꽃잎의 향기를 맡아보는 황후.
 
도통 뜻을 짐작하기 힘든 표정입니다. 저 낯에 서린 것은 수심일까요, 아니면....
 
바네사 라르셀:한 밤의 공기가 황후님께 흡족하셨다면, 무엇보다도 기쁠 일이겠지요.(느리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순하고, 또 순진하기 그지 없는 얼굴로.) 밤 공기는 차갑지 않으신가요?(굳이 당신의 낯에 떠오른 것들을 분석하려 들지 않았다. 그 정도가 당신과 바네사의 거리에 딱 적합했다.)
 
벨라 페터스:그래. 오늘은 날씨가 괜찮네. (당신의 순진한 낯을 바라보다 몸을 돌린다. 앞서 한 걸음을 나아갔다.) …바네사, 네가 이 성에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더라?
 
바네사 라르셀:(그저 당신의 뒤를 따랐다.) 올해로 4년 쯤이 되었을까요, 황후님? 사실 그 때부터 황후님의 곱디 고운 자태만을 뒤따르고자 황후님의 뒤를 좇았는데.(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뱉었다. 깔린 녹안이 정원의 꽃들을 훑었다. 여전히-,) 이런 꽃들과 비할 수 없이 고우신지 모르겠습니다.(이 말이 당신의 심기를 거스를까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바네사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할 뿐이었고, 어쩌면 4년동안 그리 살아왔는데도 자신이 당신 옆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라도 신뢰를 가졌을 법 했다.)
 
벨라 페터스:듣기 좋은 소릴 하네. (앞서 걷고 있었기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음성만은 부드럽다.) 그래, 벌써 사 년이라… 세월이 참 빠른 것 같아.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당신을 뒤돌아본다.) 네 한결같은 마음이 기껍구나. 세상에는 쉽게 변하는 이들이 너무 많지. (그림자가 드리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미세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벨라는 제 가슴팍을 장식하던 브로치를 떼어내더니 당신에게로 휙 던졌다.) 받아 두렴, 바네사. 지난 사 년 간 네가 보여준 정성에 대한 보답이란다.
 
바네사 라르셀:제 진심일 뿐인걸요?(매사 다정한 음성만을 내뱉는 바네사는, 뒤를 돌아본 당신을 당황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음영 진 가운데서도 당신의 웃는 얼굴은 제게 너무나 선명했기에.)
(브로치를 받았다.) 그러나 황후님, 이상한 일이에요.(브로치를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리로 시선을 내리며 느리게 이야기했다.) 곧 황후님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버려요. 단지 제 착각일까요?(순진무구한 표정에 이름 모를 들꽃같은 웃음을 그려낸다. 눈매로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들어, 화려한 장미꽃같은 당신을 바라본다.)
 
벨라 페터스:내가 여기 말고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순한 얼굴로 손을 뻗어 뺨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에 다시 발걸음을 뗀다. 얼마 못 가서 옅은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위태롭던 걸음이 휘청였다가 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선다.) …음. 그래. 요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 같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꼴이긴 하구나.
 
바네사 라르셀:황후님.(급히 걸어가 당신의 안위를 살폈다. 그렇지만 감히 당신의 옥체에 손을 가져다대진 않았다. 바네사는 한 걸음 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다소곳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그래서 항상 걱정이랍니다, 저 바네사는.(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은 종종 바네사에게 무기력함, 혹은 억울함을 새겨주기도 했다. 물론 그 크기를 따지면 작을 뿐인 축에 속했겠지만. 한숨을 삼켰다.) 시종들을 한 번 물갈이를 했는데도 이러네요.(아니면 음식 말고, 다른 것이 원인이었을까. 바네사의 눈이 살짝 가라앉다 말았다.)
 
벨라 페터스:괜찮아. 거기 있어. (손을 뻗어 다가오는 당신을 멈춰세운다. 이내 곧게 허리를 세우고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 말렴. 내 선에서 수습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요즈음도 주제 넘는 시종들이 꽤 많은 모양이지. 다시 정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제는' 불필요한 일이다. 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어깨를 감싸쥐었다가 바네사를 돌아본다.) …이만 들어갈까? 밤이 늦어 쌀쌀하구나
 
바네사 라르셀:(당신을 바라보며 언제나와 같은 눈빛으로, 부드러이 웃음 지었다.) 저 바네사는 언제나 황후님을 따라요.(순종적으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벨라 페터스:(숙인 머리를 바라보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곤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긴다.)
 
당신은 그렇게 황후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1. 도입
 
: 황후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첫머리부터 ‘폭풍우 치는 밤 비에 젖은 시종이 달려들어와 외치는’ 희곡을 보면 누구나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의 성질은 본래 뻔한 것이어서, 벼락이 궁성 그늘을 날카롭게 밝히던 밤, 꼭 무슨 사건이라도 터질 것 같다는 하녀들의 수군거림 속에 기어코 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적막하던 황제의 침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고 있었고, 당신은 황제궁 근위대장에게 보고할 내용이 있어 잠시 들른 차였습니다.
 
황후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바로 조금 전인데요. 갑자기 승하라니요?
 
이 경악할 소식에 황제는 짧게 탄식했을 뿐입니다. 귀찮은 일을 맞닥뜨린 사람 같은 태도였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죽었다니 어떻게 된 것인지 가서 보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고, 당신도 급히 그를 따라 황후궁으로 움직였습니다.
 
2. 사건 첫날, 황후궁
 
들어설 때부터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제국의 안주인이 기거하는 곳이라기엔 수가 적은 사용인들이 저마다 공포에 질려 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도착하자 모두 황급히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는 가로막는 사람 하나 없이 황후의 침실로 직행합니다. 당신도 마음이 급하겠지만 황제보다 앞서갈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 뒤로 그나마 침착한 시녀장 백작 부인과 하녀들이 뒤따릅니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들어서던 황제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끔찍한, 아주 끔찍한…….
 
그 여자, 수백송이 장미 중 가장 화려한 한 송이를 꺾어 유리 온실에서 자라난 듯한 여자, 숨죽여 아름다운 그 아가씨…
 
찐득찐득한 피가 엉겨붙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그것이 도저히 생전의 황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팔과 다리는 기이한 각도로 꺾였고, 눈, 코, 입, 귀, 부위를 가리지 않고 온몸의 구멍에서 혈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혼탁한 눈을 홉뜬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얼굴은 역할 정도로 희게 질려 비위가 약한 사용인 몇은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날 지경이었습니다.
 
목욕 직후에 사건이 발생했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정돈되지 않은 채 풀어헤쳐졌고, 차림새 역시 가벼운 나이트가운이었습니다. 벗겨진 슬리퍼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바네사, SANC 1/1D4
 
바네사 라르셀:
SAN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54
판정결과: 보통 성공
(부드러이 웃었다.)
 
탄식 속에서 황제와 시녀장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황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시녀장: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목욕하신 직후 앉아서 시중을 받으시다 갑작스레…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습니다. 자작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자작이라면 황궁 전담 의사인 월도프 자작을 이르는 것입니다. 과연 시체 곁에 시립한 그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녀장은 황제의 추궁에 몇 마디 답변을 더 내어 놓습니다.
 
시녀장: 저와 시녀 하나, 하녀 둘, 이렇게 도합 네 명이 황후 전하의 목욕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으셨고, 황후께서는 물에 몸을 담근 채 잠시 잠에 드셨을 뿐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목욕을 한 후 침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셨는데, 제가 머리카락을 말려 드리기 위해 타올을 든 순간, 갑자기 온몸에서 피를 뿜으면서…… (내내 침착하던 음성이 조금 떨렸다. 참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쓰러지셨습니다.
하녀 하나가 급히 월도프 자작을 부르러 갔고, 5분도 되지 않아 그가 도착했으나… 황후께서는, 이미…….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 ……기이한 일이로구나. (영 떨떠름한 기색으로 듣고 있다가 한 가지를 더 묻는다.) 이전에 황후가 몸이 아프다 말한 적은 없었는가?
 
시녀장: 예. 특별히 아프신 곳은 없다 하셨습니다.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인다.)
 
동석했던 시녀들과 하녀들은 겁에 질려 떨면서도 시녀장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대답합니다.
 
황제는 짜증스럽게 침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새벽 동안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을 가려내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조는 갑작스럽게 횡액을 당한 반려의 사망을 밝혀내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에 가까웠죠.
 
이 급사急死가 황실의 책임이 아님을 밝혀라.
 
신 앞에서 평생 함께 걸을 것을 맹세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사건을 두고 지시할 만한 일은 아니죠.
 
그러나 황제 입장에서는 썩 기꺼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때 자신이 총애하며 온갖 권력을 쥐어 주었던 그녀인 것을요.
 
마음이 식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꽤나 골칫덩이죠.
 
이미 황후의 입김으로 중앙 정치에 발을 들인 신하가 한둘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가진 베갯머리 송사가 과연 하루이틀 일이었겠어요?
 
황제의 마음이 돌아선 것도 그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돌아보니 황후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 있었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요.
 
황제는 너무 많은 사랑을 주었던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비탄도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잠시 후 시신을 수습할 의사와 보조인이 두 명 더 왔고, 시녀장은 휘하 사람들의 입단속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이 곳을 더 살펴 보거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캐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런다고 해서 죽었던 황후가 살아 돌아올 일은 없겠지만요.
 
바네사 라르셀:아! 불쌍한 우리 황후님, ...(자그맣게 속삭이며 손을 들어 당신이 주었던 브로치가 달린, 제 가슴께 위를 덮었다. 몇 초를 넘어서게, 그렇게 당신에 대한 묵념.)
(감았던 눈을 뜨고 이 곳을 살펴보기로 한다.)
 
바네사는 어느 곳을 먼저 살필까요?
 
바네사 라르셀:(원형 침대를 살펴볼래요.)
 
황후가 평상시 취침하는 원형 침대입니다.
 
호사스러운 금사가 수놓였고 장정 서넛이 동시에 누워도 될 정도로 넓지만, 전후사정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황후가 눕기도 전에 변을 당했기 때문에 침대 자체에는 그다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요.
 
자세히 살펴볼까요?
 
바네사 라르셀:(네. 그럴래요.)
 
바네사, <관찰> 판정.
 
바네사 라르셀: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8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침대 아래에 묵직한 뭔가가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바네사 라르셀:(꺼내서 살펴봅시다!)
 
몸을 숙여 들여다보면… 작은 궤짝 상자일까요?
 
그러나 주변에 사람이 많은 지금 그 궤짝을 함부로 꺼내 열어 보아도 좋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는 않습니다.
 
바네사 라르셀:(때마침 오늘은 로브를 두른 형태의 옷을 입고 나왔으니까요. 안에 감출 수 있을까요?)
 
감추어 가져가기에는 너무 무거워 보입니다. 상자를 살피려면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다시 와 보는 게 좋겠어요.
 
바네사 라르셀:(알겠어요. 궤짝을 다시 안에 집어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일어났다. 잠시 주변을 둗ㄹ러보다, 옆에 있는 의사를 발견하고 의사에게 다가간다.) 혹시 시간이 되실는지요.(부드러운 미소는 그대로, 그러나 말투에선 다정함과 상냥함을 언뜻 제한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월도프 자작:말씀하시오. 이게 무슨 변고인지…….
 
바네사 라르셀:황후 폐하의 사인死因 중 약물로 인함이나, ... 그런 것은 추측할 수 없을까요.(눈썹 한 쪽을 살짝 들어올렸다 말았다.)
 
 월도프 자작:음, 글쎄… 저렇게 칠공에서 피를 쏟으실 정도라면, 갑자기 외부에서 큰 충격, 그러니까 공격 같은 것을 받아 내장이 크게 손상되는 급의 상처는 입어야 하는데. 아무리 강한 독이라 해도 건강한 분을 기미도 없이 저리 만들 수가 있을지… 좀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사인은 아직 불분명하오. 오리무중이군.
 
바네사 라르셀:이것 참 음험하기 그지 없는 일이로군요. 감히 이 신성하기 그지 없는 황실에, 이런 변고를 끼치다니.(혀를 쯧쯧차며 쓸쓸한 표정에 안타까움을 섞어내었다.) 자작께서도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이제 한동안 바쁘실테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적당히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바네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당신의 말. 기침하며 균형을 쉬이 잡지 못했던 당신의 뒷모습. 이미 예상하고 계셨겠지요? 어쩐지 자신조차 이유 모를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바네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티테이블과 의자로 걸어가서, 그를 살펴볼게요.)
 
찻주전자와 티세트 한 벌, 먹다 남긴 마들렌 한 접시가 놓인 테이블입니다. 티세트는 깨끗하게 닦인 상태입니다.
 
황후가 목욕 전 간식으로 먹던 것이고, 차와 곁들여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마들렌 역시 수상하지 않은 평범한 마들렌으로 황실 주방장이 만든 간식입니다.
 
바네사 라르셀:(시녀들을 좀 갈아엎어야 할 때이긴 했어도 당장 독극물을 이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황후님의 사인은 감히 나로썬 짐작하기도 어려울, 어쩌면 상상을 벗어난 류의 사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조금씩 확고해진다.)
(명화 앞으로 걸어간다. 명화를 보자.)
 
개국 황제 부처의 유명한 일화를 담은 초상화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관찰> 판정.
 
바네사 라르셀: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80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가장자리 끝부분이 벽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손으로 더듬어보니… 우측 변에서 작은 구멍 같은 것이 언뜻 손끝에 느껴집니다.
 
크진 않습니다. 얇은 펜이나 머리 장식 끝부분의 핀 따위가 들어갈 정도.
 
바네사 라르셀:(무언가를 넣어서 끼워 맞추는 구조인가? 바네사는 곁눈질로 아직 황후의 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몰래 이 곳에 들어와봐야겠네. 침대 밑의 궤짝도 그렇고.)
(뒤돌아서, 이젠 보석함이 놓여있는 화장대까지 걸어갔다. 당신의 핏자국을 조심히 건너 뛰어, 보석함을 먼저 살펴본다.)
 
황후가 앉았다 쓰러진 화장대입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워 가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앉아 있다 피를 토했다는 증언이 사실인지 거울과 서랍 등에도 피가 튀어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제외한다면 화장대와 의자 자체에는 크게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과 액세서리 등이 보이고, 보석함 하나가 열린 채 놓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후의 반지와 목걸이 등이 담겼습니다.
 
그런데 보석함 내부가 어쩐지 이상하네요.
 
바네사 라르셀:음,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어 번 정도 눈을 깜빡였다.)
(보석함 내부를 자세히 살펴볼게요.)
 
값비싼 액세서리 여러 개가 없어졌고, 남은 액세서리 중에서도 목걸이, 반지 등을 장식하던 화려한 보석 몇 개가 뚝 떼여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라진 보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어디로 간 거죠?
 
바네사 라르셀:(누가, 대체? 지었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었던 것 같다. 비음을 흘리고 벽시계로 걸어갔다. 지금은 몇 시?)
 
묵직한 디자인의 벽시계입니다. 낡고 오래된 것이지만 운치는 있어 보입니다. 시간이 멈춰 있네요.
 
<관찰> 판정.
 
바네사 라르셀: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3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자세히 보니 이 벽시계는 유리문을 열 수 있는 장식장과 같은 구조입니다. 겉면을 열어 꼼꼼히 살펴 보면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조금 이상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를 자주 조였다 푼 듯이 헐겁고 긁힌 자국도 났네요. 조금만 힘을 주면 분침이나 시침을 따로 분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바네사 라르셀:(분침이나 시침을 아까 명화의 그 구멍에 집어넣는 걸까? 황후님의 방에는 참 신기한 물건들이 많구나. 소소한 감탄을 삼켰다. 어차피 사람들이 다 나갔을 때 다시 방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니까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한다.)
(욕실로 향해본다.)
 
욕실로 통하는 문. 문 앞에 발을 닦는 깔개가 놓여 있습니다.
 
목욕을 끝내고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일이 생겼다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욕실에는 아직도 훈기와 습기가 있고, 욕조의 목욕물과 목욕 중 마신 듯한 와인마저 그대로입니다.
 
바네사 라르셀:(혹여나 또 와인에 무엇이 들었을까, 의심하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저것은 자신이 손대면 더 사인을 분석하는 데 오리무중이 될 뿐이니까. 몸을 돌려 욕실을 나온다.)
(드레스룸으로 가볼까?)
 
황후의 옷과 보석 등을 보관하는 방으로 가는 문입니다. 닫혀 있습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바네사 라르셀:(후~. 이를 어쩐담. 갈 곳이 없네. 아주 자그마한 고민을 삼키며 빙긋 웃어보였다. 시녀장에게로 향했다.) 시녀장님. 괜찮으셔요?
 
그녀의 안색은 영 좋질 못합니다.
 
황후가 입궁할 때부터 함께 따라 들어와 수족처럼 그녀를 모시던 최측근 시녀장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굉장히 창백하고 자세히 보면 손수건을 쥔 손을 떨고 있지만, 어떻게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애쓴다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이 궁에 들어온 이후로 쭉 함께해오던 직속 상사이기도 하죠.
 
당신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봅니다.
 
 시녀장:……그래. 라르셀. 물을 것이 있니?
 
바네사 라르셀:(바네사는 많은 것을 고민했다. 아마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별 탈 없이 건강했다고만 생각했을텐데.) 황후님께서 최근, 몸에 이상이 없었다는 건 정말 사실일까요?(바네사는 애써 울음을 삼키려 애쓰는 어린 시녀의 낯을 연기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 충격에 빠진 눈동자와 일그러짐을 견디려는 얼굴 근육까지.) 저는 정말로, 황후 폐하께 이런 조짐을,(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견디려는 모습. 시녀장, 당신과 같이 차분해지려 힘쓰는 바네사의 꼴.) ... 알아차리지 못해서요.
 
 시녀장:황후께서… 최근 심하게 아팠던 적은 없으셨네. 늘 앓으시던 두통이나 체기 같은 걸 제외하면…… 잔병치레가 잦으신 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그건 만성적인 일이었으니까. (애써 침착하려는 음색으로 대꾸한다. 우는 당신의 얼굴을 안쓰러운 듯 바라보며 위로했다.) …가장 가까이서 모신 나조차 눈치채치 못했는데도. 자책하지 말렴.
 
바네사 라르셀:... ...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버렸어요.(어느새 맺힌 눈물을 검지 손가락 끝으로 훔쳐내며, 바네사는 자그맣게 미소지었다.) 예. 저도 자책하지 않을테니, 시녀장님께서도 결코 자책하지 마세요. ... 황후 폐하께서도 그건, ...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입 발린 소리를 잘도 내뱉는다. 바네사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노래를 부르듯 사람을 홀릴 때가 있었다.) 이만 할 일을 하러 가볼게요. 부디, ... 마음에 근심을 덜으셨으면 좋겠네요.(작게 시녀장에게 인사를 했다.)
(당신의 방을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의 시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시체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역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SANC 0/1
 
바네사 라르셀:
SAN Roll
기준치: 79/39/15
굴림: 3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시신이기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차갑고 어딘가 무기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단… 지독하게 잘 만든 나머지 도리어 불쾌한 도자기 인형 같다는 인상입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형태인 나이트 가운을 입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덜 말라 젖은 상태입니다. 눈과 코, 귀, 입가에서 모두 피가 흐른 듯합니다.
 
특히 토해낸 피가 많은지 가슴팍에 검붉게 뭉친 핏덩이가 튄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눈은 아직도 부릅뜬 상태입니다.
 
발은 화장대 의자 방향, 머리는 벽 방향입니다. 천장을 바라본 자세로 쓰러졌습니다.
 
바네사 라르셀:눈은 감겨주지 그랬나요,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의 시체를 마주하고 있자니 썩 미소가 잘 지어지지는 않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바네사는 조심히 치맛자락을 잡고 쭈그려앉아, 치맛자락을 붙잡지 않은 손을 뻗어 당신의 부릅뜬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애정 어린 손길로 눈을 감겨주었다.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감히 당신의 옥체에 손 댈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에 진득한 피가 묻어났나?)
 
일어서는 바네사의 손이 붉습니다. 벨라를 연상시키는 빛깔입니다.
 
침실을 전부 둘러보고 나면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깁니다.
 
의사들은 1차적인 검사를 마무리했고, 흐느껴 울던 황후궁 일원들 역시 우선은 자리를 정리하려는 뜻을 내비칩니다. 오늘은 우선 돌아가 잠들어야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잠이 올까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지만 이 밤을 수놓은 은하수의 물길 중 어느 줄기에도 그녀처럼 선명하고 눈 아플만큼 밝은 빛으로 빛나는 항성은 없습니다.
 
황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 그저 곤란하고 귀찮은 일인 듯이 새벽의 황궁도 묵묵히 조용하기만 합니다.
 
당신은 이 기이한 사건이 황제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볼 건가요?
 
3. 사건 이튿날
 
이윽고 아침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반짝인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날씨가 좋은 오전이었습니다.
 
당신은 평상시처럼 세수를 하고, 오전 근무를 서기 위해 나섰습니다.
 
어제 갑작스러운 황후의 승하로 황궁 안이 온통 어수선합니다. 근무지인 황후궁까지 가는 동안 몇 사람인가를 마주칩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근위병이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요.
 
근위병: 라르셀! 너 어제 그 자리에 있었다면서. (꽤나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묻는다.)
 
바네사 라르셀:어머, 안녕하세요?(부드러운 미소를 습관처럼 지으려다, 표정을 뒤바꾸며 꽤나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예. ... 그리 되었네요.(시선을 조금 떨구곤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근위병:너도 많이 힘들겠다. (침울한 얼굴이 되더니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다 덧붙인다.) 얘기 들었어? 황후 전하의 시신이 수습되어 관으로 들어갔대. 피를 토한 것 외에는 상한 부분이 없어서 처리가 빨랐다나…. 국장은 일주일 뒤래.
…그렇게 천시하던 것치고 최소한 황후로서의 예우는 해줄 모양인가봐. (조금 궁시렁대는 말투였다. 그는 평소 황후 전하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이건 정말 비밀인데, (속삭이듯 몹시 작은 음성으로.) 폐하께서는 오늘 오전에도 업무 들어가기 전 정부와 만났다고 하더라… 정말 너무하지 않아?!
 
바네사 라르셀:(흐린 미소를 지었다.) 아녜요, 괜찮아요. 그냥 가슴이 많이, ... 허할 뿐, ...(가슴께 위에 손을 올려보이다가.) ... 아무리 그래도 이 나라의 황후니까, 예의는 다할거라고 생각했는데.(그러므로 문득 피어나는 이것은 분노다. 오로지 당신을 위한.) ... 겨우 일주일 뒤라는 사실은 가슴이 많이 아파요.(어쩌면 타인들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모습일텐데도, 진실로 가슴이 아파오는 착각을 느낀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바네사는 지금, 정말 당신의 처우에 가슴을 아파하는 중이었다. 가슴께 위를 덮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옷자락을 조금 구긴다. 한참을 침묵했다. 웃는 눈을 들어 근위병을 보았다.)
알려줘서 감사해요, 그래도.
 
 근위병:(당신의 표정을 안쓰러운 듯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어깨를 두어번 토닥거렸다.) 그렇게, 너무, 기 죽지 말고. 너도 힘내…… (화제를 돌리려는 듯 얼른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말야. 검시한 의사 태도가 좀 이상하던데. 뭐라더라, 황후 전하의 심장 부근에…….
 
바로 이 타이밍에, 멀리서 사색이 되어 달려온 다른 근위병 동료 하나가 고함을 칩니다.
 
근위병 동료: 백작님께서 시체로 발견되셨습니다! 지금 난리가 났어요!
 
근위병: 살해? 백작? 어디의 백작을 말하는 건데?
 
동료는 발을 구르며 그 어마어마한 말을 차마 쏟아내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여기서 동쪽.
 
황제의 시종장 휴베르트 백작 이야기입니다.
 
알현실, 백금 옥좌로 가는 여섯 개의 길.
 
이 나라에서 황제가 앉는 왕좌는 ‘여섯 길 위에 앉은 백금 옥좌’라고 불립니다.
 
정말 백금으로 만들었다는 까닭도 있고, 건국 설화에 여섯 개의 순례길과 관련된 일화가 나오는 고로 황제궁에도 여섯 순례길을 본따 중앙 홀로 다다르는 여섯 복도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섯 복도가 모이는 둥그런 방을 거치면 비로소 중앙 홀 출입문이 등장하고, 다시 문을 넘어서야 백금 옥좌에서 천하를 오시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공식적인 행사날 황제를 알현하는 자들은 이 방에서 무기를 맡기고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백여 년을 내려온 위엄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목도하게 됩니다.
 
평생 황제를 모셔온 노백작이, 그 깐깐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궁전을 호령하던 또다른 우두머리가……… 바지가 벗겨진 채 죽어 있었습니다.
 
SANC 1/1D2
 
바네사 라르셀:
SAN Roll
기준치: 79/39/15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으!)
rolling 1d2
 
(
1
 
)
 
 
=
1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무려 ‘황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중앙 홀 앞에’ ‘목을 매달아 공중에서 덜렁거리는’ ‘시종장의’ 시체인데도, 허리 아래 사정이란 본래 단두대에 매달린 사형수의 눈마저 돌아가게 하는 성질을 지니는지라 사람들은 아주 본능적으로 그자의 낡고 주름진 국부를 먼저 바라보게 되고 맙니다.
 
그 볼품없고 초라한 위용은 황제의 아낌없는 신임을 받는 충신으로서 여느 공작 못지 않은 명예를 자랑하던 남자의 최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게 쪼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사정을 모르고 얼결에 섞여 들어온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남성들이라고 해서 탄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스울 법도 한 상황인데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역겨운…….
 
하필 오늘은 중앙 홀을 사용하는 공식 행사가 있는 날이었기에 몰려든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했습니다.상황을 살피고 싶은데 이대로 있다간 군중에 파묻히게 생겼군요. 어떡하죠?
 
바네사 라르셀:(어디 몸을 피할 곳이 없을까?)
 
<은밀행동> 판정.
 
바네사 라르셀:
은밀행동
기준치: 70/35/14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아이코.)
(못 볼 걸 본 충격이 너무 컸나봐요. 한 번 더 하면, 잘 할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시도해봅니다.
 
바네사 라르셀:
은밀행동
기준치: 70/35/14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잉.)
(포기할게요. ...)
 
포기하지 말아요, 바네사!
 
<은밀행동> 판정.
 
바네사 라르셀:(그렇다면 ... 한 번 만 더!)
은밀행동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야.)
 
그래요.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구요.
 
바네사 라르셀:(황후님, 보고 계시죠?)
 
당신은 구석의 비어있는 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시체를 바라봅니다.
 
노인의 시신을 바라보면,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가슴께가 피로 젖어 있네요. 교살당한 시체에 혈흔이 있을 까닭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목 부분이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꼼꼼히 살피지 않았기에 확실하진 않지만, 목졸려 죽은 시체라면 벗어나고자 격렬히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상처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 시신은 마치…… 이미 죽은 시체를 뒤늦게 고리줄에 꿰어 놓은 듯한 꼴이 아닌가요?
 
이때 군중이 급히 갈라집니다. 황제가 도달한 것입니다. 노기에 찬 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시종장의 시신 앞에 섰습니다.
 
노인의 비참한 꼴을 보고 주먹을 말아쥔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씹어 뱉듯 말했습니다.
 
황제: 반드시 찾아내 엄정히 단죄하리라!
 
피를 토하며 죽은 황후의 시신을 내려다볼 땐 어땠었죠?
 
……
 
그리고 다시 나흘이 지났습니다.
 
황후의 서거로부터 엿새째, 그녀의 죽음까지 살인으로 친다면 6일간 황궁에 연쇄살인이 5건이나 발생했습니다.
 
황제가 아끼던 시종, 황제가 아끼던 요리사, 황제와 친분이 두텁던 대귀족…… 모두가 황제와 친밀한 연관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황궁은 스산하리만치 조용하고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연히 황제파라고 알려진 대귀족 인사들은 아예 황궁으로의 발걸음마저 끊었습니다.
 
국장 기간과 겹쳐 모든 무도회며 행사가 취소되고 연일 경비를 강화하니 구역을 막론하고 모든 곳이 사람 사는 공간 같지 않게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험흉한 것들이 돌았습니다.
 
그것은 발이 없으되 평소에는 높으신 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장 낮은 곳까지 무엇보다도 쉬이 건너갈 줄 아는 힘을 지닙니다.
 
세상에 말보다도 빠른 것은 없기에 평생을 황족의 옷자락 하나 밟아보지 못할 이들까지도 쉬쉬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로 떠나 보내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황후가 궁을 저주하고 있다.
 
황제에 배신당하고 독을 품은 황후가 원혼이 되어 궁을 떠돌고 있다!
 
그런데 황제와 정부만은 살아 있습니다.
 
어째서?
 
4. 국장 전날
 
황제는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채 황제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부와 단둘이 심처에 몸을 숨기고 근위병들로 황제궁을 겹겹이 둘러싸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비를 단단히 했다지요.
 
순찰을 지독하게 강화했고, 근위대 업무는 평소보다 배로 늘어났으며 수도 경시청까지 협조를 시작했습니다.
 
며칠간 수사를 거듭하면서 근위대에서도 나름대로 알아낸 정보가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근위병 친구가 와서 넌지시 전해주고 간 소식입니다.
 
당신은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중심으로 순찰을 도는 임무를 배정받게 되었습니다.
 
건네받은 지도를 보면 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마다 붉은 점이 찍혀있군요.
 
시녀에게 순찰이라니, 인력이 모자란 김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겠다는 걸까요.
 
아무튼 오늘 당신의 담당 구역은 우측 별관과 성당입니다.
 
바네사 라르셀:(둘 다 시신이 걸렸던 곳이네. 조금 설렐지도. 별 다른 생각을 않고, 먼저 우측 별관으로 향합니다.)
 
별관으로 이동합니다. 스산한 바람이 뺨을 스칩니다.
 
시신 자체는 이미 치워졌고, 범행이 벌어진 공간만 보존해둔 터라 당신은 특별히 추가로 조사할 것이 없습니다. 황제가 눈을 뒤집고 인력을 충원했거든요.
 
근무 목적 자체는 단순한 경계이니 한 바퀴 순찰만 돌아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별관 뒤쪽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들이 눈에 띄네요. 저들은… 황후를 수습한 장의사들이군요?
 
무언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네사 라르셀:(이야기를 엿들어볼게요.)
 
바네사, <듣기> 판정.
 
바네사 라르셀:
듣기
기준치: 80/40/16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무언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잘못 본 거 아니지?
: 그랬다니까. 자작이 요청해서 가슴을 갈랐는데, 심장에 다이아몬드가 꽂혀 있었다고. 아주 주먹만한 게.
: 그게 어떻게 거기 박혀 있어? 뭐, 드셨거나 하면 위 같은 데에 있을 수는 있어도. 심장을 보석이 찌르고 있다는 게…….
: 수상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야. 왜 있잖은가, 그 별관에서 죽은 하녀. 그 여자 주변에도 보석 가루 같은 게 있었어.
: 아, 그 얘기라면 나도 들었네. 박물관이고 성당이고 다 검출됐다던데. 에메랄드나 루비 같은 게.
 
거리가 멀어졌는지, 목소리는 그대로 끊어집니다.
 
바네사 라르셀:우리 황후님 보석함에도 보석이 여럿 사라졌었는데. ... ...(잔잔히 웃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별관에서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이제 성당으로 가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바네사 라르셀:(좋아요. 별관에서의 일을 마무리짓고, 성당으로 향합니다.)
 
성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길목에는 화려한 장미들이 시들지도 않고 피어 있습니다.
 
문득 심장을 저미는 듯한 추억이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 브로치를 받던 날, 황후와 장미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었죠.
 
그런데… 어, 뭔가 본 것 같습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모퉁이를 돌아 급히 사라지는 검은 형체 같은 것을요. 저 방향은 도서관으로 꺾는 방향인데요.
 
인기척을 쫓아 도서관으로 달려가니, 어느새 인형은 사라지고 난 후입니다. 확실히 본 건 맞을까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복도엔 개미 한 마리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도서관 1층이라면 바로 저쪽에 열람실이 있죠. 들어가면 사서 노인이 있을 거예요.
 
바네사 라르셀:(와, 요즘 황궁이 완전 소설책 속으로 빠져버린 것만 같아요. 심심찮게 생각하며 열람실로 향했다.)
 
사서 노인: …오, 바네사구나. 어서 오렴. (꾸벅꾸벅 졸던 노인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당신을 발견하고는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서 노인께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네사 라르셀:안녕하세요,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무해한 얼굴로 물음을 건넨다.) 혹시 검은, ... 사람을 보신 적 없으신가요? 분명 이 쪽으로 오는 누군가를 본 것 같은데, 따라와보니 놓치고 말아서요.(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사서 노인: 글쎄… 발자국 소리는 못 들었고, 누가 지나가는 것 같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구나. 요즘 귀가 어두워서 말이야. (인자하게 웃는다.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어젯밤에 황후 전하를 뵙기는 했다.
 
바네사 라르셀:한창 졸음이 늘 시기이긴 해요.(자그맣게 웃음을 흘리며 당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한데, 황후 전하를 뵈었다니요?(황후님, 정말 요즘 황궁이 소설책 속으로 빠져버린 것 같다니까요.) 옥체는 멀쩡하셨던가요?
 
사서 노인: 음, 뵈었지. (고개 주억이곤.) 분명 돌아가셨다는 것은 아는데 그래서 꿈인가 생신가……. 아마 늙어서 헛것을 본 거라곤 생각하지만, 어제 잠결에 뵌 기억이 있네.
나는 가시는 길도 못 챙겨 드렸으니, 귀신으로라도 한 번 더 뵈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노인을 기억하고 만나뵈러 와 주신 건가 했지. 그래, 생전과 다름 없으셨단다. 칠흑같은 망토를 두르고 계셨던 것만 빼면.
 생각해 보니 전하께서 책을 몇 권 빌려 가셨는데 그게 아직 안 돌아왔구나. 너는 황후궁에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걸 좀 전해줄 수 있겠니? (허허 웃으며 물을 따름이었다.)
 
바네사 라르셀:잠결에 뵈었는데, 칠흑같은 망토를 두르시고 책을 몇 권 빌려가셨더라고요?(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눈웃음을 지었다.) 예, 제가 책임지고 책을 가져올게요. 황후 폐하께서 어떤 책을 빌리셨을지 기대가 되는걸요.(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찾아오시겠지? 마냥 확신할 순 없었지만 눈 앞의 사람까지 당신이 모습을 보인 마당에 저라고 당신을 보지 못할까,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아무튼 감사해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황후님을 뵙고 싶네요.(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나가볼게요. 말해주셔서 감사하구요.(몸을 돌려 열람실을 벗어난다.)
 
당신은 열람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네사 라르셀:(황후궁으로 향하자.)
 
황후궁으로 돌아옵니다.
 
수사 라인과 순찰선이 둘러쳐져 있지만 당신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병들이 수월하게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고 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황후가 사망한 날 석연찮았던 부분이 떠오릅니다.
 
미처 못 보았던 부분을 다시 살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네사 라르셀:(우선 사서님이 부탁했던 책들이 어디 있나 찾아봅니다.)
 
당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숨겨두기라도 한 걸까요.
 
바네사 라르셀:(그렇다면 우선순위를 미루고, 침대 아래의 궤짝을 열어볼게요.)
 
침대 아래의 궤짝을 살핍니다. 단단히 잠겨있습니다.
 
열쇠 구멍은 아주 작고 가는 것을 찔러넣어 열 수 있을 것 같군요.
 
바네사 라르셀:(궤짝을 침대 위에 놓고, 벽시계로 가서 시침과 분침을 분리합니다.)
 
바네사는 시계에서 분침을 분리해냅니다.
 
바네사 라르셀:(분침으로 궤짝을 열어봅니다.)
 
열쇠구멍에 시계 분침을 꽂아넣자 궤짝이 열립니다.
 
안에는 굉장히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잿가루와 뼈를 태운 듯한 흔적, 복잡하고 불쾌한 수식을 갈겨 쓴 종이 조각, 반쯤 녹은 다이아몬드 조각, 사람 모양을 본딴 천 인형이 있습니다.
 
이게 다 뭐죠? 대체 황후궁에 왜 이런 게 있나요?
 
바네사 라르셀:이게 다 뭐람, ... ?(눈을 꿈뻑였다. 일단 놔두고 명화로 가서, 명화의 구멍에 분침을 끼울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개국 황제 부처의 유명한 일화를 담은 초상화입니다. 가장자리 끝부분이 벽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었죠.
 
우측 변의 작은 구멍에도 마찬가지로 시계 분침을 꽂아 넣으면 뭔가 딱 맞물리는 느낌이 들고, 달칵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됩니다. 문처럼 잡아당겨 열어보는 형식입니다.
 
액자 금고 안에는 다양하고 기묘한 물건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아주 낡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왠지 뭔가 액체로 잔뜩 젖은 듯이 날강날강한 책 서너 권, 문장이 되지 않는 단어들을 마구 흘려 쓴 종이 몇 장, 보석 조각 등이 보입니다.
 
바네사 라르셀:... 설마 이 책인가?(이를 어떻게 돌려줘야 하지? 우선 책을 꺼내봅니다.)
 
책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불쾌한 느낌을 줍니다. 제목이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
 
오컬트 기능+2 상승, SANC 0/1
 
바네사 라르셀:
SAN Roll
기준치: 78/39/15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슬쩍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불쾌하고, 소지하는 것을 걸렸다면 당장 파문당할 정도로 악마적인 지식들이 담긴 책입니다.
 
누군가를 저주해 죽이는 방법, 원석이나 귀금속을 이용해 사람에게 깃들었다는 마력을 끌어올리는 방법, 사람을 인신공양해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고 모독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방법…….
 
바네사 라르셀:(설마하니 이걸 도서관에서 빌렸을 리는 없겠다. 아무래도 책을 찾는 건 포기해야 하려나?)
(종이 몇 장을 살펴봅니다.)
 
첫 장엔 몇 가지 복잡한 수학 공식, 그리고 반복해 그린 오망성 모양이 눈에 띕니다.
 
둘째장은 뭔가를 옮겨 적은 듯한 내용인데, 전부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귀금속을 매개로 추악한 마법을 부리거나 저주 의식을 치르는 법, 사람을 본딴 인형을 만드는 법 등에 관한 메모입니다.
 
세번째 장은 다시 오망성 그림, 그리고 넓은 장소에서 별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위치마다 제물을 희생시켜 끔찍한 일을 벌이는 마법진 술식에 대한 번역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엔… 오늘 날짜만이 써있군요.
 
무슨 의미일까요, 이건?
 
바네사 라르셀:음~.(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황제님이 돌아가시려나보다!(자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어쩐지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바네사?
 
바네사 라르셀:황후님이 직접 이런 모든 것들을 습득하신 건가요? 눈치라곤 하나도 못 챘는걸.(혼자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집어넣는다. 명화를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침대 위로 열어놓은 궤짝으로 걸어갔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원래 있던 대로 돌려놓았다. 벽시계도 마찬가지.)
(이로써 바네사가 발견한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황후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따라야지.)
(바네사는 딱히 이 나라의 유감이 없다. 기실 그것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신과는 4년간 함께한 '정'이랄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황제는 오히려 비호감이라면 비호감이었지, 결코 오늘 당신이 행할 살인에 안타까움 따위의 감정은 하나 들지 않았다. 당신의 방을 나온다. 아예 황후궁을 벗어나, 황제궁으로 향한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당신과 다시 한 번 대화라도 해보고 싶은 소망이었달까.)
 
5 " 5. 황제궁
 
당신은 황제궁으로 향합니다.
 
불안감이 심장을 파먹고 목까지 옥죄는 것 같습니다. …실은 거짓말이에요. 별 감정의 동요는 느껴지지 않는 걸요.
 
다시, 비가, 비가 내립니다. 동토를 할퀴는 날씨, 음산하게 번쩍거리며 발걸음을 잡아채는 뇌우…….
 
어디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황제궁은 너무 넓습니다. 기이하게 사람이 없습니다.
 
수많은 근위병들은 다 어디로 갔죠? 동료들은요? 선배들은?
 
황제는?
 
비 내리는 밤에 황제가 있을 법한 곳이라면 어딜까요? 침실? 어디든 생각나는 대로 뛰어가 봅시다.
 
당신이 침실까지 뛰어가면 바로 문 앞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립니다. 당장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비가, 비가… 질리도록, 비가…….
 
……
 
황제의 침전입니다.
 
전부 열어젖힌 창문에서 비가 들이치고 있었습니다. 멀리 황궁을 둘러싼 산으로 낙뢰가 꽂히는 것이 보입니다.
 
번쩍, 하고… 물방울 같은 게, 튀는데, 이토록, 뜨거운 것이, 비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낙뢰를 걸머지고 반쯤 어둠 속에 갇힌 조그만 인영이 있습니다.
 
아래 쓰러진 남자는 이제 왕홀도 보주도 쥘 수 없는 어떤 것. 국새나 보관도 더는 그의 영광을 보장하지 아니할 테지요.
 
심장을 크게 꿰뚫어 꽂힌 칼을 타고 황족의 피가 흐릅니다. 저토록 고결한 것인데도 도무지 가장 천한 자들의 붉음과 다를 바가 없는……
 
눈이, 눈이 마주칩니다.
 
공중에서 불꽃이 튑니다. 상대가 당신을 알아봅니다.
 
평소처럼 그림같은 미소를 그려낸 시선이 아니라, 심지를 가져다 대면 당장에라도 발화점을 폭발시킬 것 같은 안광입니다.
 
음울하지 않은, 진득하지 않은, 차갑지 않은, 황후 같지 않은, 미쳤으되 건강하고 생경하며 살아 날뛰는 격노.
 
어쩌면 그녀가 너무나 기다렸을 문장,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죽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를 문장.
 
꼿꼿이 편 등허리를 벼락처럼 훑어 내리는 작열감에 몸을 떨면서, 그녀가 말합니다.
 
벨라 페터스:그래, 나란다.
 
눈을 마주치는 행위가 촛불과 촛불을 마주 대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서느런 눈초리에 일순 불티가 튀었습니다.
 
뜨거운 빛깔로 갈무리된 성노가 넘실거립니다. 황후는 숨을 죽입니다. 그토록 오래 준비해온 말, 단어 하나하나 선명하게 씹어 뱉습니다.
 
벨라 페터스:내가 황제를 죽였어.
 
숫제 속삭이는 어조였습니다. 튀어 오른 불티가 그녀의 안구를 잡아먹고 혈관을 불사르며 시퍼렇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회광반조라도 상관없었습니다. 이 낯설고 자유로운 불의 홍수를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왔으니까요.
 
방식도 색채도 달라진 화火가, 희열처럼 여기 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네사 라르셀:(바네사가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기이한 열망이었다. 아, 4년동안 당신의 뒤를 열심히 좇았는데도 그런 당신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넘실거리는 그 모든 광폭한 감정들은 이 낯설기 그지 없는 묘사들은 그야말로 바네사를, 아찔하게 만들어버려서, ... ...)
(매사 당신에게 띄우던 잔잔한 미소가 아닌, 사람들에게 보이던 상냥하고 다정한 웃음이 아닌 인간의 원초적 희열로부터 발현되는 기쁨, 그 자체를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었다!) 아, ... 아아!(불타오르는 것이 저에게까지 느껴졌다. 옮겨붙은 불을 꺼트릴 생각을 바네사는 결코, 할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은 무기력과 방조가 아닌 주체적인 동조, 나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싶다는 전율. 떨리는 두 손을 들었다. 열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그래야지만,) 황후님, ... ...(이 저열하고 추악한 표정을, 욕구를, 본능을 가릴 수 있었으므로. 바네사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후님, 저희 황후님, 황후 전하,) 예전부터 그토록 황후님의 뒤를 따랐는데. 그 곱디 고운 자태만을 뒤쫓았는데,(불사른다.) 모두 기억나질 않아요.(숨이 막혔다.) 황후님, 지금 어찌 그리-,(심장이 탔다.) 그리도 아름다우신지요.(그러므로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당신을 닮았다.)
 
벨라 페터스:바네사. (서슴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핏물 흥건한 바닥을 맨 발로 딛고 네 가까이 다가섰다. 무릎 굽힌 당신의 앞에 허리를 숙인다. 붉은 손아귀가 네 뺨을 틀어쥐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억센 힘.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난폭을 전신에 고스란히 걸치고서 벨라는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분명 네가 좋아할 걸 알았지.
날 보렴. 감추지 말고. (사뭇 다정하게 속삭이며 당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 끝의 핏자국이 흰 뺨 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너도 그간 숨겨온 것이 많았을 거잖아.
 
바네사 라르셀:보지 마세요, 황후님,(바네사는 드러난 감정을 주체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토록 제 추악한 면모가 수면 위까지 올라온 것은 평생을 살며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분명. 억센 힘에 틀어잡히면서도 바네사는 목을 졸리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바네사는 비유하자면 새로운 생을 안고 태어난 것만 같았다. 낯선 공기를 들이마쉬는 것은 아프고 눈을 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힘들었으나 이로써 바네사는 존재한다. 바네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제가 어찌 당신의 명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벨라.)
황후님께 비하면 너무나 추악한걸요, ... ...(환희 그 자체인 웃음, 눈물, 콧잔등을 약하게 찌푸린 것까지. 바네사는 되려 당신보다도 살생자의 겉가죽을 뒤집어 쓴 것만 같았다. 당신이 친절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핏자국이 남는다. 따뜻하다. 뜨겁다. 화상을 입을 것만 같다. 불, 그 자체다. 바네사는 무력하게 당신을 올려다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저항? 말도 안 되는 소리.) 황후님은, 지금 살아 계신거죠?(자살행위임을 알았다. 옳지 않다는 것도 알긴 알았다.) 이번에는 저를 데려가 주실 건가요?(그러나 때때로, 사람은 어떤 길이 옳은지 알면서도 다른 길을 택할 때가 있었으므로.) 이제 황후님이 없이는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요.(바네사는 스스로를 죽인다.)
 
벨라 페터스:나는 죽은 적이 없어. 모두가 날 죽은 것 처럼 취급하긴 했으나, 한 순간도. 결코. 그런 적이 없단다. (나직하게 속삭인다. 우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진심으로' 감격에 겨워 우는 얼굴. 지금 이것은 염두에 두지 않은 만남이었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실은 당신이 제 흔적을 찾아 이 곳까지 걸어오게 될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너는 나와 동류였으니까. 나는 첫 눈에 그걸 알았어.)
그럼, 날 위해 살아, 바넷…… (말 끝 늘어트리며 벨라는 당신 앞에 똑같이 무릎을 굽혔다. 이제 당신 없이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되어버릴 것 같다며 울고 있는 제 소녀를 바라본다. 몸을 바짝 가까이 하더니, 너를 끌어안듯이 등 뒤로 손을 뻗어서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고 있는 머리끈을 풀어헤쳤다. 그대로 어깨를 툭 밀쳐내어 바닥으로 쓰러트린다.)
(당신의 고개 옆에 한쪽 손을 짚고서는 내려다보았다. 저와 똑같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모습에 벨라는 만족한 듯 짙게 웃는다.) 그저 내 곁에 있으렴.
 
바네사 라르셀:그럴거라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뻔했는걸요.(말하자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었지만, 더 말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이미 제 모든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나의 밑바닥까지 당신께서 하나하나 파헤친 지 너무나도 오래 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이 곳에 왔어요. 황후님이 황제를 죽이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대화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더 이상의 기쁨이 없을 정도로 웃었다. 이토록 행복한 순간이 있었나? 여지껏 겪어온 행복의 총량이, 혹은 그 깊이가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당신이 감히 자신의 눈높이로 내려와 무릎을 굽혔다. 제 머리끈을 풀어헤치고, 바닥으로 쓰러뜨린다. 바네사가 말한다. 이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지고 있었다. 자신이 타인이 그토록 애정하는 상냥하고 다정한 인간이든, 혹은 죽었다고 알려진 황후가 황제를 살해한 것을 보고 전율하는 추악한 인간이든.)
그러니 말할게요.(눈을 휘어 웃었다.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 바네사의 모든 것은,
당신만을 위해 존재해요.
(오늘은 바네사의 새 탄생일. 뱀이 허물을 벗고 탈피하듯 다정하고 상냥한 바네사 라르셀이 오로지 벨라 페터스, 당신만의 바네사로 태어난 날이었다.)
 
벨라 페터스:(네가 입술을 달싹여 한줄 한줄 뱉어내는 고백을 기껍게 듣고 있다. 얼굴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귓가로 쓸어넘겨주다가, 마지막 말에 붉은 입꼬리를 짙게 휘어낸다. 이 연악하고 추악한, 상냥하고 이기적인, 어딘가 미쳐 있어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존재가, 제 것이다.)
(그녀가 그리 만들었다.)
그래, 아주 잘 했어…. (가벼운 충동으로 당신의 이마 위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몸을 일으킨다. 제가 쓰러트린 당신의 손을 강하게 붙잡아당겨 똑같이 일으켜 세운다. 이내 손아귀를 단단히 틀어쥔 채 황제의 시체 앞까지 바네사를 이끌었다. 휘청이는 걸음은 오직 감정이 격양되어 나오는 몸짓이다. 카페트 위를 짓밟는 발 끝에 전율이 실려 있었다. 벨라는 황제의 심장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검을 뽑아낸다. 다시금 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칼날은 달빛 아래 여전히 섬뜩하게 빛났다.)
(벨라가 휙 돌아섰다. 아주 멀리서도 선명할 그 눈동자. 희미한 녹음이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 아침이 올 거야. (네게 칼 손잡이를 건넨다. 그녀의 피 투성이 맨 발이 죽은 황제의 얼굴을 짓밟아 돌렸다.) 그 전에… 이 늙은이의 목을 베어야겠지.
네가 하겠니? (물음처럼 들렸지만, 명령이었다.)
 
바네사 라르셀:(가벼운 키스에 심장 한 켠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감정들의 촉감이 몹시도 기분 좋았다. 언제부터 이리 되었을까? 바네사는 분명 당신과 저 사이의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을 선을 긋고 그러면서도 당신을 애정했다. 아니, 그런 표현은 제가 감히 붙일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었으니 정정하자면, 당신을 동경했다. 선망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자신이 당신의 덫에 걸렸든, 타오르는 들불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되려 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든 따지는 것은 너무나도 무의미해졌다.)
(굳센 손에 붙잡아 일으켜졌다. 이 순간부터 당신과 자신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저에게 더는 황후가 아닌 벨라 페터스가 되었으며, 저는 당신에게 당신만의 바넷이 되었을 까닭이었다. 그대로 함께 시체까지 걸어간다. 존재가 하도 무가치해 어느덧 잊어버리고만 있었던 황제에게로. 맞잡은 손이 있었다. 어느덧 우리는 같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의 색마저도 옮겨 붙어 해 질 녘의 노을색을 따다 붙인 그것과 동일했을 것이었다. 이제야 바네사는 노을 진 하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의 색을 당신과의 모든 순간에 대입하게 될 것이었다.)
아침이 오면,(바네사는 눈물과 피로 얼룩진 얼굴을 움직여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아가 해가 질 때의 하늘을 같이 봐 주세요, 벨라님.(그러나 그 안에 이전과는 달리 번들거리는 욕망이 감추어지지 않은 것을, 당신은 분명 발견했을 것이었다. 검을 받아든 바네사가 고아하게 검을 한 손으로 고쳐쥐었다.)
(검을 위로 치켜들고,)
(그대로 황제였던 남자의 목을 잘라내었다. 이어 바네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바네사 라르셀:해가 지면 밤이 찾아들겠죠.
벨라님의 고운 흑단과 같을 색이니, 밤하늘도 무척 아름다울 거예요, 분명.
 
벨라 페터스:물론, 네 몫이지.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충만한 미소다.) 무엇을 보더라도 내 생각을 하렴.
(이제 머무를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널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떠날까.
 
바네사 라르셀:예, 벨라님.(환히 웃었다.)
 
END END 1.
 
새벽을 사르는 불꽃
 
당신은 함께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요.
 
미친 여자가 저기 있습니다, 황제께서 붕어하셨습니다, 당신이 사 년을 정성 들여 모셔온 그 여자가 결국 사달을 내었어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인간성을 버리기로 합니다.
 
인륜을 저버린 여자, 광장에 매달아 분시해 마땅할 여자, 당장 파문당해 고해성사조차 허락되지 않을 마녀, 악마에게 홀린 년, 삿되고 추한, 사람도 아닌…….
 
당신이 애정해 마지않는, 벨라 페터스. 그 여자와 함께요.
 
당신이 향하게 될 곳은, 죽음을 몇 차례 건너야 할지 모를 길입니다. 무엇에 발목 잡혀 넘어지게 될 지 모르는 험지입니다. 어쩌면 평생토록 멈춰설 곳을 찾지 못해 헤매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떠날 건가요?
 
그래요.
 
대답은 그 손에 들린 황제의 수급이 전했습니다.
 
바닥에 점점이 얼룩진 피웅덩이를 밟으며 벨라 페터스가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별빛으로 반짝이는 보관을 썼을 때에도, 제국의 달로써 칭송받던 때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고귀와 권위를 피로서 채운 악마가 여기 있습니다.
 
황후도 후작 영애도 아닌 여자만이 온전히 여기 남아서, 어쩌면 다섯의 목숨을 바치고 황제를 죽여 바로 당신을 얻은 채로.
 
당신은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자비로운 신조차 받아주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산 자로되 산 자가 아닌 것처럼 살면서 악마와 손잡은 자신을 파먹을 겁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아무런 겁도 내지 않고서, 그 여자의 손을 붙잡은 채 함께 지옥으로 가려고…….
 
이렇게 환히 웃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새 벨라가 당신의 뺨을 움켜쥡니다.
 
벨라 페터스:해 뜨는 순간, 지는 순간도, 아니 너의 시간 전부…
오로지 내게 네 모든 것을 주어야 해.
이제는 그렇게 살아, 바넷.
 
음성이 귓가를 스치더니,
 
……
 
입맞춤에서는 피비린내가 났습니다.
 
분명 자신은 타락한 벌을 받는 거겠죠. 악마에게 홀린 죗값을 치루는 거예요.
 
키스는 달콤하지 않습니다. 아주 날 것의 감각입니다. 가쁜 호흡마저 죄 삼켜져 심장이 요동칩니다.
 
그런데 손 끝을 저리게 만드는 이 희열은, 쾌감은 무엇이란 말이에요…
 
……
 
입안 가득한 혈향을 머금은 채로,
 
이제는 떠납시다.
 
아침이 오기 전에 떠나요!
 
복도엔 우스울 정도로 아무도 없습니다. 좁은 구두를 신고 누구보다 우아한 몸짓으로 모든 이의 시선을 앗아가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 그 미친 여자가 달립니다. 하다다닥, 바깥의 빗소리를 재연하듯 맨발로 복도를 질주합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새벽을 사르는 여명을 향해…….
 
당신이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이 여자는 돌아 버렸고, 함께 도망쳐 버린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피 묻은 손을 놓지 않고 두 사람은 황후궁으로 달립니다. 마차를 부를 것입니다. 황후의 문장도 황제의 휘장도 달지 않은 짐마차를 탄 채 광증 어린 자유의 세상으로 갈 겁니다.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숨을 크게 들이킵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아침의 첫 공기가 폐를 감쌉니다.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도망치면서 누굴 또 죽이게 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여자가 한 손으로 얼굴에 번진 핏물을 닦았습니다. 스치는 물기는 울음인가요? 아니요, 아닙니다. 웃음입니다.
 
벨라는 미루어 왔던 감정을 한꺼번에 터트리듯이 소리 높여 웃습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갈무리된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찢어지고 변뎍이 날뛰는 웃음입니다.
 
너무 읏느라 숨이 모자라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다가, 남의 피가 섞여 분홍빛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훔쳐내면서 다시금 미친듯이 웃고……
 
벨라는 그러면서도 뛰는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벅차와도 온 힘을 다하여 말했습니다.
 
쭉, 나는 이렇게 하고 싶었어. 감히 그 누가 나를 얽맨단 말이야…….
 
그리하여 이곳에, 도덕도 양심도 왕관도 전부 저버린, 사람조차 아닌 그저 둘이 서 있게 됩니다…….
 
……
 
봐! 요정처럼 순수한 아가씨, 저토록 사랑스러워 이름마저 그럴 테지.
 
복중에서부터 연약했을 것이고, 자라나 사뿐사뿐 걷던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신부로 클 게 분명했겠지.
 
성벽 너머 치열한 온도, 호쾌하게 들판을 달려 나가는 말발굽 소리, 가질 수도 없고 욕심내서도 안 되었을 일들을 덜고 나면 남는 것은 백합 한 송이뿐.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 아가씨.
 
그러니 당신도 고민해 보자, 왜 내게는 한 줌 봉오리만이 쥐어졌을까?
 
나의 반려는 세상을 열었다는 신화 속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모두가 장차 한몫은 해내야 한다는 서사를 부여받으며 태어나잖아.
 
나는 이제 어여쁘기만 한 건 싫어.
 
들불 속을 맨발로 달리는 여자가 되고 싶어,
 
잔인한 바람과 칼날처럼 핏줄을 저미는 공포를 느끼고 싶어.
 
내게도 분노가 있어,
 
여과 없는 화火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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