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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 사람과 곧 끝나버릴 영원을 약속하지 않겠습니까.
▼ Cast
2020. 12. 20
KPC │이권
PC │윤아라
엽몽담(葉夢談)
w. Anne
2020.12.17
KPC 이권
PC 윤아라
00. 도입
영명 20년, 불길이 태격(太檄)궁에 번져듭니다.
삽시간에 번진 불이 흉흉히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립니다. 강하게 분 바람 한 토막에 몽유국의 자랑이라던 숲과 들이 한 줌 재로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따금 튀는 불똥이 도망치는 궁인들과 관리들의 소매며 치맛자락에 흔적을 남기고, 만년이나 이 제국의 영광을 지켜왔다던 태격궁의 기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제 몸을 무너트리니, 이 불길이 꺼트리지 못할 영화(榮華)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황제:이대로…,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 아아, 귀비…! 귀비…!
광인의 고함이 당신의 정신을 깨어 놓습니다. 문득 앞을 바라보던 찰나, 영명제는 당신이 달랠 겨를도 없이 피를 토해냅니다.
그의 배를 뚫고 지난 검날은 당신의 몸이 겨우 닿지 않을 거리에서 동작을 멈춥니다. 울컥, 한 움큼 토한 피가 바닥을 기던 소매를 적시고 나면 이다지도 초라한 모습으로 황제가 쓰러집니다.
당신은 지금 피로 몸을 적신 칼의 주인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내려다보는 이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자야말로 암군을 끌어낸 영웅으로 시대에 기록될 위인이며, 몽유국에 하나뿐인 적통 후계자요 태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칼을 손에서 놓고 당신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은 그가, 손을 들어 당신의 낯 위로 튄 선혈을 지워냅니다.
타닥타닥 빨갛게 온 성을 물들인 불길 속에서, 그의 음성은 희미하나 무겁게만 들립니다. 촉광같이 흔들리는 그의 눈빛은,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권:… …. 귀비. 나의, 이 사람의 황후가 되시겠습니까.
아아, 이다지도 우둔한 물음이 다시 있을까요…. 어쩌면 결말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우리, 지난날 다른 선택을 하였더라면 말입니다….
01. 엽하비연동심취(葉下飛鳶同心醉)
나무 밑 함께 연을 날리며 빠져드니.
영명 4년.
태격궁의 유일한 귀비인 당신은 황제와 함께 후원을 거닐고 있습니다.
당신의 처소인 환휘전(幻徽殿)에서 멀지 않은 이 후원은 각종 희귀한 동물과 재배하기 어려운 화초가 넘쳐나는, 황제가 당신에게만 하사한 선물입니다. 몇 주 전부터 시공에 들어간 후원은 근일 건축이 끝나 영명제가 친히 당신과 함께 이 장소를 노닐기로 하였습니다.
나인들을 거느린 당신과 황제의 행렬이 길게 늘어집니다. 당신의 옆에 선 영명제(永明帝)는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후원의 자랑거리를 일일이 당신에게 설명하는 그는, 오늘도 아낌없는 애정을 당신에게 내보입니다.
황제:…이 홍학을 들이자마자 소미인이 얼마나 시기를 보였는지 소중한 나의 귀비께서는 아실 리가 없을 테지. 뭐, 좋소. 귀비가 이 후원을 마음에만 들어 한다면 어떤 동물이든 구해오지 못할까.
듣자하니 요즘 들어 멀리까지 산보를 나간다던데, 귀비, 혹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아라, <지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0/35/14 |
굴림: | 7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영민한 당신은 영명제의 말에 숨은 뜻을 빠르게 알아챕니다.
아무리 당신이 연약한 귀비라고 해도, 작은 바람 몇 자락 스쳤다고 고뿔이 들 리가 있을까요?
그는 아무래도 당신이 환휘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는 듯합니다. 최근 영명제는 유독 당신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합니다.
지금 그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지만, 동시에 확실히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며칠만이라도 이 정원보다 멀리 나가지 않는 게 좋겠네요. 참으로 답답할 노릇입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영명제를 바라보면, 그는 무해한 표정으로 웃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의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웃는 낯에 숨겨진 진의가 어찌나 위협적인지 모를 정도로 당신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무소불위의 천자는 자신의 기분에 조금만 거슬려도, 가차 없이 아랫사람을 처분하고는 하니까요.
얼마나 더 산책을 즐겼을까, 곧 그가 당신에게 고개를 까딱입니다.
황제:오늘은 이쯤하고 먼저 정사를 돌보러 가지. 부디 쉬시오, 귀비.
윤아라:... ... (느릿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순종적이고, 무해하기 그지 없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옷자락을 살짝 붙잡고 몸을 숙였다. 눈을 내리깐다.) 오늘도 부디 강녕하소서.
그렇게 황제가 떠나가고 나면, 이 부운부귀(浮雲富貴)한 후원에는 당신 홀로 남겨집니다.
궁인들은 숨을 죽인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가까이 보이는
못
주변에 세워진 기암괴석이 남다른 운치를 자아내고, 멀리 선 수풀
은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립니다.윤아라:(못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소리도 동행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보면, 그 넓은 것 아래 저와 함께하는 것이 그림자 하나 뿐인 것에 다소 마음이 쓰라렸다. 고개를 숙였다. 멍하게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아라, <못>에 관찰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4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후원 중앙에 파인 인공 연못으로 다가갑니다. 잔잔한 수면, 잉어 한 마리 살지 않는 연못에는 버들가지가 드리운 그림자만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날카롭게 연못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돌들이, 이 다소곳한 풍경에 위엄을 더해…. 응? 저기, 가장 낮은 바위 위에 연이 하나 떨어져 있습니다.
윤아라:... 연?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것이길래. ... 주워들 수 있나?)
당신은 먼발치에서 연을 바라봅니다. 연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이나, 품을 많이 들여 꾸민 티가 납니다. 종이를 여러 겹 덧댄 용의 형상을 한 연은, 하늘 위에서는 나는 새보다도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겠지요.
하지만 하필이면 왕과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라니, 보통의 궁인이 가지고 노는 물건은 아니겠습니다.
윤아라:(연을 손에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수풀 쪽으로 시선이 미친다.)
수풀 가까이 다가가볼까요?
윤아라:(걸음을 옮긴다.)
아라, <민첩> 판정.
윤아라:
기준치: | 50/25/10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수풀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호라, 과연 이 뒤에 뭔가 숨어있는 모양이지요.
. 앗…! 몰래 다가가던 당신에 한발 앞서, 수풀 뒤에 숨어있던 것이 빠르게 달아납니다.
콰당, 그만 당신이 넘어지면, 타닥 작은 발소리가 들리고…. 놀란 얼굴을 한 소년이, 나무 뒤에 숨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윤아라:... ... 누구십니까? (다급하게 외쳤다가,)
…이 궁에 드나들 수 있는 아이는 많지 않습니다. 부모가 고관대작이거나, 왕부에서 황제의 형제들을 따라서 왔거나…. 그도 아니면, 어느 후궁 처소의 황자…,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아들뻘이 되겠네요.
하지만 이 중 어떤 경우라고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앞의 아이는 소박한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옷감은 가치가 높은 것이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지 소매에는 닳은 흔적이 눈에 띄고, 흘끗 내려다본 자그만 손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즐비합니다.
윤아라:... ... ...
크게 뜨인 눈은 당신의 얼굴에 오래도록 시선을 올려두다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인사를 올립니다.
이권:…귀비 마마, 소자 이권이 귀비께 인사드립니다.
윤아라:(눈을 동그랗게 뜨며 표정을 조금 굳혔을까. 당신에게 느리게 다가가려다가, 걸음을 멈춘다. 곧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바닥에 무릎을 대며 몸을 숙였다. 시선을 맞추었다.) 태자. 제가 상처를 잠시, 살펴보아도 될는지요.
이권:…아… (소년은 어딘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인다.) 별 것 아닙니다. 염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귀비 마마.
잘 보면, 귀 끝이 언뜻 붉습니다. 공손한 태도를 가장하면서도 당신을 바라보는 눈망울에는 여즉 아이다운 천진함이 남아있는 모습입니다.
당신은 단박에 그의 신분을 알아차립니다. 어미 없는 태자…. 모두 그를 그렇게 부르던가요.
: 태자마마, …이곳은 폐하께서 귀비 마마께 하사한 후원입니다.
조심스레 당신과 태자를 일깨운 사람은 당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궁인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말에는 어렴풋이나마 당신에게 황제가 하사한 공간을 침범한 황자에 대한 질책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에게 보내는 것 치고, 눈빛은 지나치게 날이 서 있습니다. 만일 태자의 친모인 황후가 살아 있더라면, 누구도 그의 앞에서 이리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이권:…나는 단지 연을 찾으러 왔을 뿐이다. (아이는 무뚝뚝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한 발짝 걸음을 물린다.)
윤아라:... 그만하십시오. (궁인에게 부드럽게 손을 내저었다.)
... 태자, 아무래도 태자께서 찾으시는 연을, 제가 발견한 듯 합니다. (당신을 향한 미소는 잔잔하니 흔들림 없었다. 가지고 있던 연을 건넨다. 그러며 자그마한 목소리를 뱉어 이르기를.) 오늘 밤, 믿을만한 아이를 통해 약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살짝 눈매를 휘며 웃었다.)
이권:…… 감사합니다, 귀비 마마. (소년은 당신의 부드러운 미소를 마주하고선 붉어지는 뺨을 감추지 못한 채 건네는 연을 받아들었다. 자그만 손이 연 끝을 만지작댄다. 그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얼마간 머뭇거리다가 당신을 흘끗 올려다본다.) 귀비 마마…. 괜찮으시다면, 소자와 잠깐 어울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목소리는 엄숙함이 서려 있지만, 그래도 어린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태자는 자신에게 오는 관심이 오랜만인지, 좀처럼 당신과 떨어지기 싫은 듯 은근히 아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지만…. 슬하에 자식은 한 명도 없죠. 갈 곳 없는 태자는 그저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당신에게 은혜를 입어 어버이로 모시고자 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권:…제가 연 날리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듯 하여… 마마께 방법을 여쭙고 싶습니다. (아이는 눈치를 보듯 당신의 안색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윤아라:(이제는 손을 뻗을 수 있었다. 당신의 볼로 뻗어져나가는 손길은 느릿느릿해서,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테다. 당신이 피하지 않는다면 손끝은 볼에 닿아, 찬찬히 주변 뺨을 쓸었을 테다.) 저도 마땅히 어울려주는 사람이 없던지라. 외로웠던 때였는데, 아주 잘 되었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 손을 붙잡으라는 양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함께 가요, 태자. (봄날의 햇빛마냥 선연한 애정이 시선을 타고 당신에게 닿았다.)
이권:(당신의 손이 뻗어지고서야 어린 낯이 환해졌다. 더운 체온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아이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가 서툴게 손을 뻗어 당신의 옷 소매를 붙잡는다. 당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아이는 고운 천자락에 매달렸던 손을 거두고선 제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는다. 당신의 등 뒤로 햇살이 비쳐 눈이 부시다. 홀린듯이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이내 수줍은 기색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예, 마마.
(아이는 잡은 손에 꼭 힘을 주었다.)
윤아라:(다정하게 손을 이끌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연 놀이 말고, 태자께서 또 좋아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권:(아이는 발 끝을 바라보며 걷다가 다정한 목소리에 느릿느릿 시선을 들어올렸다.)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스승께 검을 배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궁을 산책하는 것도요. (붙잡은 손이 어색한지 조금씩 꼼지락댄다. 금방 시선을 떨구었다. 옷깃 아래로 비치는 목덜미가 붉었다.)
윤아라:나는 검을 쓰질 못합니다. 하니, 태자와는 함께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하는 것밖엔 하지 못하겠군요. (열이 있나? 당신과 맞잡지 않은 손을 뻗어 잠시 당신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하거나. ...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릴 떄 찾아드는 열병은 무시할 것이 못 됩니다, 태자. (표정에 걱정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이권:…상처는, 그저 소자가 미숙하여… 걷다 넘어진 것 뿐입니다. 정말 괜찮습, …. (이마에 손을 얹어보면 제법 뜨거웠다.)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을 한 채 당신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말을 잇던 입술이 잠시 멈칫합니다.
유달리 붉게 물든 그의 낯이, 아이다워 앙증맞기만…. 응? 아이의 몸이 흔들립니다. 혹시…!
이권:…………아라…….
윤아라:... 태자!
몇 걸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발을 내딛던 아이의 몸이 바닥에 쓰러집니다.
…허약하다던 말이 사실이었군요. 그나저나 방금…. 그가 당신을 이름으로 불렀던가요? 태자가 쓰러졌는데, 그를 지키는 궁인이며 무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요.
아이의 온몸이 뜨겁습니다. 역시,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은 끓는 열 때문이었던 모양입니다.
윤아라:... ... (결국엔 자신밖에, 없다는 소리였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성적이게끔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태자, (태자를 안아들었다. 직접, 어의가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끔찍하게 다정한 목소리가 뱉어지는 것은, 그래.) 조금만 참으십시오. ... (자신도 외로웠기 때문일지.)
(아이를 안아들고 어의에게 향한다.)
당신은 아이를 직접 안아들었습니다.
어의를 부르려면 마땅히 태자의 궁으로 향해야겠으나,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태자에게 주어진 처소가 지나치게 '검소'하다고 하던가요. 땔감조차 제대로 피우고 있지 않다는 말을 스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합니까?
윤아라:(잠시 권을 안아들고 발을 동동 굴렀을까. 어쩌지, 어쩌지. 태자의 궁으로 향한다 하나. ... 제대로 치료받을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옮겨간 발걸음은,) ... ... (본인의 궁이었다. 이 일이 밝혀지게 되면 황제가 저를 내치게 될까. 노할까? 그러나, 이 짧은 시간만으로 당신에게 정이 들어버린 것을 어떡할까. 모성애와 같은 것이 가슴을 꽉 채워 저의 심장을 애달프게 녹이니 이것은 참 저항할 수 없던 일임에 틀림 없었으리라. ...)
당신은 아이를 안아들고서 당신의 궁으로 향했습니다. 뒤따르는 궁인들에게서 마마, 하고 부르며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듯 했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지요.
자신에게는 너무 큰 침대에 누운 태자는 열로 얼굴이 한껏 달아올라 있습니다. 가쁜 숨을 쉬며, 정신을 다잡지 못하는 와중에도, 태자는 어쩐 일인지 당신을 얕은 목소리로 부릅니다.
이전, 당신과 태자 사이의 왕래는 잦지 않았으니 오늘 당신이 그에게 남긴 인상이 상당히 깊었던 모양이지요?
봄이 다 오지 않은 계절,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외풍이 매섭습니다. 숨을 색색거리는 어린 태자
는 말이 없고, 문 뒤에서, 채신머리없는 궁인
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입니다.윤아라:(급하게 창문을 닫으며 소리를 내었다.) 어의를 불러오거라.
: 예, 마마님. (당신에게 공손히 대답하는 목소리. 뒤이어 누군가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라, 창문에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이를 살피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꼬박 지나가 시간은 해시(저녁 9시 30분~11시 30분)에 이르렀습니다. 어둡게 깔린 밤하늘 사이로 알알이 박힌 별들이 눈부십니다.
파란 나무의 잎사귀들이 서로 엇물리며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를 냅니다. 우거진 가지 사이로, 뜬 달은 둥글기만 합니다.
윤아라:
기준치: | 70/35/14 |
굴림: | 2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문 틈새로 궁인들의 조심성 없는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들은 태자에 대해 나쁜 감정을 지녔는지 겨우 아이일 뿐인 그에게 서슴없이 악담을 퍼붓습니다.
: 방금, 봤어?
어떤 거 말야?
일국의 태자라는 분이, 옷매무새 하며…. 이런 분을 태자로 세우다니, 제국의 위상이 어찌 될는지….
말조심해, 혹시 누가 들을지도 몰라!
뭐 어때? 지금이야 잠깐 동정심으로 우리 마마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하지만, 뒷배도 없는 황자잖아! 태자를 대신할 인물이 많으니, 이대로 자란다면 궁인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어쩔 수 없는 태자는 내쳐지고 말걸?!
쉿, 조용히 하라니까!
윤아라:... 피곤하니 다 물러가겠느냐. (부드러우나 단호한 음성이 그것들을 끊었다. 조심히 땀 젖은 권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넘겼다.) 오늘의 이 일은 다들 함구하도록 하고. (어차피 곧 소문은 다 퍼지게 될 것이었지만 말이다.)
: 아, 예, 마마. (잠깐 부산스러운 소음이 일더니 금방 조용해진다. 궁인들은 문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갔다.) 편히 쉬십시오.
윤아라:(침대에 누운 태자의 옆에 조심히 앉고는,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아. 이것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던가. 순수한 애정 따위를 나눠본지 얼마나 되었지. 시선이 아득하게 젖어들어갔다. 당신이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 태자. (손을 내려 손을 붙잡았다.) 연 놀이는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벌써 앓아누우셨습니까. 제가 너무 태자를, 기대하게 만든 탓일는지요. ...
당신은 지쳐서 누워있는 태자를 봅니다. 본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로 태어난 태자이나 그는 어쩐지 황궁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이 약하다더니, 그 또한 진실이었군요.
이권:…송구… 합니다, 마마… 심려를 끼쳐드려…
태자는 겨우 정신을 차린 기색입니다. 마른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조심스레 당신의 새끼손가락을 붙듭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당신은 그에게서 아이 특유의 천진함과 함께….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괜히 가슴을 간질거리는 기분이 당신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윤아라:... ... (이상하게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 황제께서 나를 그토록 귀애하시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지금 드는 이 감정은, '그런' 감정일까?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다 말았다.) 잠드십시오, 태자. 제가 곁에 있어드릴테니. ... (그렇다면 언젠가는, ... ...)
대답 없이 가쁜 숨소리가 이어지기를 한참.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던 아이는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려 합니다.
이권:…아닙니다, 마마..
아이의 시선은 경대 위에 닿아있습니다. 후궁의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그곳에는 작고 정교한 화전(花鈿)함이 놓여 있습니다.
이권:…귀비 마마, 화전에 얽힌 옛날이야기를 아십니까?
문득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태자는 아주 차분합니다. 당신은 기묘하게도, 그런 그의 태자의 목소리에서 슬픔을 읽어냅니다.
이권:화전은 곧 떨어질 꽃잎을 모방했다고 해서, 상사홍(相思紅)이라고 불린다고도 합니다. 붙들 수 없는 봄을 붙들기 위해 미간에 붉은 꽃잎을 새기는 것이라고…. 소자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마에 매미 날개로 만든 화전을 붙여서, 인연을 붙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이렇게 어린아이가 어째서 이다지도 서글픈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그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를 아는 당신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닙니다. 잠깐 뜸을 들이던 태자는 곧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권:귀비 마마, 소자의 이마 위에 화전을 장식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이는 조심스러운 부탁을 꺼내며 이불 자락을 꾹 그러쥐었다.)
윤아라:(그 말을 들은 아라는, 그저. ... ...)
... ... 태자, 저는,
(몸을 일으켜 그것을 가져온다. 다정한 음성이 쉴 새 없이 울렸다.) ... 아주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치입니다. (어느덧 손끝이 당신의 이마에 맞닿았고.) 태자께서도 그러하시지요?
함에 담긴 화전은 붉은색으로, 매미의 날개는 아니지만 얇게 저민 물고기 비늘과 잠자리의 날개를 원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아교를 미리 발라둔 화전을 손 위에 올리고 뒷면에 살짝 숨을 불어넣으면, 녹은 풀이 묻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미간에 화전을 붙여냅니다.
이권:…소자는… (당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아이는 겁 많은 얼굴을 하고서 잠시 시선을 떨군다.) …예, 마마. 궁은 너무 외롭습니다. 제 곁에 아무도 머물지 않는 듯 하여… (말 끝이 흐려진다. 주먹을 꾹 쥐고서 다시금 당신을 향하는 눈동자에선 무엇을 바라는지 모를 간절함이 묻어났다.) 헌데, 마마께서도 외로움을 타십니까? …허나 폐하께선 귀비 마마를 몹시도 귀애하시지 않습니까. ……
윤아라:태자. (살풋 웃음을 흘렸다.) 그런 총애가 과연 어디까지 향하겠습니까. 말 하나 잘못하여, 실수를 해서, 그른 선택을 하여서. ... 참 숱한 이유로 많은 자들이 내쫓기는 궁 안이 아니겠습니까. (어렸지만, 당신이 그걸 모를 일 없었다.) 그러니 내게 드리워진 것은 찰나의 햇살이요, 한 봄날의 달디 단 꿈이로다.
... 하니. 우리 외로운 사람들끼리, 하나 약조하시지 않겠습니까?
이권:(당신의 말을 이해했기에 표정이 언뜻 무거워진다. 약조라는 말에, 아이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찰나 머뭇거릴 법도 한데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이권은 여전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며 대꾸한다.) 약조하겠습니다, 귀비 마마. 소자가 무엇을 약속드리면 되겠습니까.
윤아라:(놀란 듯 눈을 뜬다. 망설이다 조심히 이야기한다.) 조금이라도 고민하고 답하시지 그러십니까, 제가. ... 태자를 이용하기라도 하려는 사람이면 어쩌시려고, ... ... (그러나 끝에 가선 결국,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참지 못한 웃음이 꽃망울 터지듯 새어나오고, 아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이후로도 두어 번 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겨우내 웃음을 그치고선 새끼 손가락을 들어 누워있는 당신에게 내민다.)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함께 해도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면. ... ... (황제의 낯이 어른거렸다. 아라는 당신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눈을 감곤 이야기했다.)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존재가 되기로요. 그렇지만, ... (눈꺼풀을 들어올려 눈을 마주쳤다.) 이 관계가 독이 되는 순간은 우리.
가차없이 잘라버리자고.
이권:…마마께선 그런 분이 아니실테니까요. (아이는 꽃피듯 번지는 웃음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조금은 부루퉁히 중얼거린다. 내밀어진 새끼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히 제 것을 걸었다. 조용히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다가 어느덧 시선이 마주친다. 냉정하게도 들리는 마지막 한 마디, 아이는 언뜻 어두워지는 낯빛을 한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제가 마마께 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마마께서 제 외로움을 나누어 주시겠다고, 이 차디찬 궁궐에 제 편으로 남아 주시겠다고… 그리 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지요. 묻고픈 말을 전부 삼키며 아이는 떨리는 눈동자로만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리 약조하겠습니다, 귀비 마마.
윤아라:... ...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단단히 손가락을 건 것에 조금 힘을 주었다가, 손을 풀어내렸다.) 그렇다면 이만, 다시 주무시지요. 아직 아침이 멀었습니다, 태자. (다시금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연 놀이를 기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잠들고 일어나면, 훨씬 나아지실 텝니다.
이권:…예, 마마. (다정한 손길에 잠깐 어두워졌던 얼굴 위에는 다시 안도감이 번진다. 아이는 졸음에 겨운 눈꺼풀을 몇 차례 깜빡이다가 금세 곤한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태자는 요 위로 손을 내어 당신의 손을 잡고 잠자리에 듭니다. 주변을 지키는 어른이 있기 때문일까요, 잠든 낯은 평온하기만 합니다.
멀리, 태격궁을 둘러싼 숲은 밤바람에 울음소리를 냅니다. 마치, 울지 못하는 아이를 대신해 울 듯이….
02. 액상화개여용정(額上花開如涌情)
이마 위에 핀 꽃처럼 감정이 몰려드네.
영명 14년.
오늘도 당신의 몸을 단장하는 궁인들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최근 영명제는 당신을 빈번하게 찾지는 않지만, 당신의 처소인 환휘전에는 여전히 매일같이 귀한 하사품들이 연이어 내려지고 있습니다.
거울
너머로 당신의 머리를 빗고 있는 궁인은 공손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탁상에는 서책
몇 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윤아라:(거울을 흘끔거렸다.) 오늘, ... 폐하께선 날 부르신 일은 없으시더냐. (불안감이 안 생길래야. 오직 그만이 저의 동앗줄과 같지 않나.)
: 예, 마마. …아직은 없으신 줄로 아옵니다.
아라, 거울에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궁인들이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조용히 눈앞의 은경을 바라봅니다. 잘 닦인 거울 위로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이 비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당신의 얼굴만큼은 세월을 비껴간 듯 여전히 화용월태(花容月態)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음, 정말 나라가 아깝지 않은 미인이네요!
윤아라:(그러나 이 모든 것은 덧없을 뿐. 거울에서부터 시선을 돌렸다. 손짓하여 궁인을 물릴까 하다가, 그냥 둔다.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아라:
기준치: | 60/30/12 |
굴림: | 2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지난 며칠 당신이 서재에서 빌려온 책들이 모두 이곳에 놓여 있습니다. 일국의 군주를 현혹하는 후궁은, 단지 자색이 뛰어난 것만으로 오를 수 없는 자리죠. 당신의 이런 노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영명제가 그 많은 비빈 중에서 오로지 당신에게만 집착하겠습니까?
가장 위에 놓인, 당신이 어제 읽은 책은 아래와 같은 내용입니다.
[몽유국이 대륙을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기 이전, 건국의 경위를 두고 여러 전설이 혼재해 그를 따르는 사관들의 의견 역시 분분했다. 가장 널리 알려졌던 설화는 지극히 서로를 사모하던 한 쌍의 연인과 관련되어 있는데, 대범한 제국의 풍모와는 어울리지 않아 현재에 와서 이 이야기를 몽유 제국의 시초로 여기는 이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2권에서 계속)]
그래서 그 이야기가 뭔데? 참으로 절묘합니다. 이후 시간이 나면 서재로 가 나머지 내용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때, 문 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 귀비 마마, 태자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태자의 도착을 알리는 궁녀의 안광에 서늘한 기운이 스칩니다.
태자의 병을 간호해준 그 날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태격궁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파아란 임해는 조용히 이 호화로운 궁궐을 지키고 있고, 태자의 장성한 모습에도 궁인들은 흠모보다는 경계의 기색을 띱니다.
윤아라:... ... 곧 단장이 끝나니, 조금만 기다리라 전해다오. (그래. 그 사이에서 당신의 존재에 온기를 품게 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렷다.)
더욱이 몇 년 전부터는 영명제의 경고가 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설마하니 자기 자식이 위협이라도 되리라 믿는 건지, 영명제는 당신을 유독 따르는 태자를 경계하고, 당신과 그의 사이를 이간질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반면, 태자는…. 이제껏 당신이 그에게 차갑게 굴든, 자상히 대하든, 한결같이 당신에게는 상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준비가 모두 끝나면, 정당으로 나가 태자를 맞이하여도 될 것 같습니다.
윤아라:(잠시 머리 장식을 만졌을까. 다시금 제 손으로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정당으로 나간다. 다소 멍하던 얼굴이 당신을 향하는 순간에는 꼭, 살갑게 풀리곤 했다.) ─태자. 오래 기다리셨는지요?
환휘전의 뜰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 특유의 풋풋함이 살아있는 나이에 이른 태자는 궁밖까지 명성이 자자합니다.
문무 양측의 실력을 갈고 닦은 태자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현재는 이 몽유국의 수도인 단목(端木)의 어떤 청년준걸도 그의 실력을 따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결국 당신의 지아비인 영명제와 그의 눈치를 보는 이들 뿐이겠지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태자가 몸을 돌립니다. 눈이 마주치면,
태자
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봄바람처럼 따스한 웃음을 보입니다. 곳곳에 궁인들의 시선이 여전한데, 그는 개의치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당신을 없는 모친 대신이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제 피풍의를 벗어 당신의 어깨에 걸쳐줍니다.이권:아닙니다. 방금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날이 찹니다. 귀비 마마…. 그간 평온하셨습니까.
아라, 태자에게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2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태자의 미간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화전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태격궁의 산자수려한 경치에 엇물려, 마치 태자 본인이 이 푸르른 산과 들의 꽃이라도 된 듯한 모습입니다.
당신의 방에서 화전함을 보던 그날부터, 무슨 생각인지 그는 매일 이렇게 이마 위에 화전을 꾸미고 다녔습니다. 어릴 적에야 그저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으나, 날로 장성하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태자가 손을 내리면, 넓은 소매 뒤로 가려졌던 허리춤, 푸른색 실로 자수를 놓고 산호를 걸어 멋들어진 노리개가 살짝 흔들립니다. 단목성의 어떤 가인인들 그에게 흠모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전히 영명제와 그의 사이가 좋지만은 않으니, 그저 그가 걱정될 뿐입니다.
이권:이미 들으셨겠지만…. 오늘이 소자의 성인식 날입니다.
마마께서도 함께 축하해주시겠습니까.
그리 묻는 태자의 얼굴에 약간의 긴장감이 어려 있습니다.
같은 말을 전하며, 황제는 분명 어느 정도 눈치를 주었지만…. 태자의 성인식에는 당연히 큰 궁중 연회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비빈들도 당연히 자리를 채우겠지요.
태자의 명성은 지난날과는 달라, 이제 누구라도 면전에 대고 그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뒤에서 무어라고 수군거린다고 한들…. 지난 십 년 각고의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만큼은 영명제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를 축하해주는 게 어떨까요?
윤아라:(... 그동안 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황제의 눈치를 살필 수 없는 입장임에도 당신을 챙겨주고싶어 안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신은 어느덧 제 아픈 손가락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 그래.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각고의 노력과 고민과 아픔들이 싸그리 씻겨내려가는 기분이라. 아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쓸었다. 그 언젠가의, 옛날처럼 말이다. ... 자그맣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 이리, 장성한 사내가 되셨습니까. (이젠 자신이 당신에게 없어도 충분히 괜찮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 훌륭하게 자라셨습니다, 태자. ... 정말로요. (웃음이 멎지 않았다. 그러니.)
(... 성인식이 지난 뒤에도 태자와 어울려 지내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까. 아니면 지금보다도 더, 심하려나. 지능 판정이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윤아라:
기준치: | 70/35/14 |
굴림: | 88 |
판정결과: | 실패 |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우리의 관계가 서로에게 독이 되지 않을지. 나의 존재가, 네 발목을 붙잡기라도 할까봐.)
... 태자께서 기뻐하실 선물을 준비하고 찾아가겠습니다. 그러니, ... 기대하고 계셨으면 좋겠는데요. (찬 바람에 식은 당신의 손을 붙잡고 잠시 고개를 숙였을까. 그래. 당신이 성인이 되면. ... 놓아줘야겠다. 조금씩, 천천히 말이다. 이젠 충분히,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릿하게 가슴이 무언가로 먹먹해졌다. 입술을 살짝 깨물다 웃었다.)
이권:(제 뺨을 스치는 손길에 흠칫 굳어졌던 이권은 자그만 웃음을 흘리는 말간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하는 바를 짐작하기 어려운 시선이다. 그러나 감출 수 없이 열렬했다. 그는 손을 올려 제 뺨에 닿은 당신의 손을 감싸쥐며 대답한다.) …모두 마마께서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시간이란 것이… 참으로 빠르지요.
(묵묵하게 몇 초를 바라보다 아쉽게 감싸쥔 손을 놓는다. 어느새 두 사람의 눈높이는 십 년 전과는 정반대로 뒤바뀐 채였다. 이권은 말 없는 눈길로 당신을 내려본다. 차게 식은 자신의 손을 감싼 당신의 손 끝으로 시선이 향했다.) 소자는 귀비 마마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허나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은 기대해보지요. (맞닿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간다. 사뭇 다정스런 손길로 당신을 붙잡으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띈다.) 오늘도, 어여쁘십니다, 마마.
윤아라:... 어머.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앞선 것과는 다르게 밝고, 또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지만, 태자께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은 몹시 좋군요. (분위기가 더욱 부드럽게 풀렸다. 아직은 바람이 찬 날이라지만, 머잖아 이 날씨도 풀리게 될 테다.) 우리 태자의 곁에는 어느 여인이 서게 될까. 그래, 폐하께 제가 혼담 이야기라도 꺼내볼까요? (어느덧 잡았던 손을 풀어내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권:… (그는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을 풀어내려는 당신을 여전히 붙든 채 제 자리에 멈추어 선다.) 아직 이릅니다. (퍽 담담한 어조였다.) 반려를 맞이하기에는, 소자가 아직 배울 것이 많고 부족합니다, 마마.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면 소자가 먼저 폐하께 정혼을 아뢸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 마십시오. 무엇보다, 소자는 이제야 성년이 되었는데, 아직은 시간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마주 잡은 손 끝을 내려다보며 그리 대꾸한다. 훌쩍 자라난 눈높이에 걸맞게 당신을 감싸쥔 손의 크기가 넉넉했다. 단단히 굳은살 배긴 손끝이 문득 당신의 손등을 부드럽게 스친다. 우연인듯, 아무렇지 않게 버들잎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권은 그제야 손을 놓는다. 숙였던 낯을 세워 당신을 바라보며 웃었다.) 마마께선 참으로… 다정하십니다.
윤아라:(당신의 말을 듣고 나서야 차근차근 아라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 흠! (헛기침을 하며 살며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부끄러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제가 상당히, 주책맞긴 했나봅니다. 태자께서 벌써 성인이라는 것에 잠시 감격이라도 하고 만 모양이지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당신을 바라보지만, 그 순간 손등을 스치고 지나치는 바람이 있어. 아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떨었다. 어라. 지금. ... 뭐지?) ... ... 글쎄요. 태자께만 그러한지도 모르지요. (기우겠지?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긴다.) 어쨌거나, 이만 보내드리는 것이 옳겠지요, 태자. 하실 일도, 준비할 일도 많으실 테고 말입니다. (그러며 얼굴에 올리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하고 다정한 웃음. 느리게 몸을 돌렸다.) 성인식 때 봬요.
이권:예, 마마. …다시 뵙겠습니다. (그는 당신을 따라 다정스레 웃었다. 뭇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웃음이다. 한 차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몸을 돌려 떠나간다.)
태자가 떠나고 나면, 당신은 그제야 한숨을 돌립니다. 환휘전 내부로 돌아가려던 찰나, 당신의 발에 무언가 걸립니다.
처음에는 그저 태자가 둘러준 피풍의가 당신이 쓰던 것과 달라 잘못 밟았나 싶었지만…. 당신의 신발 아래 밟힌 산호 노리개는 푸른색으로, 분명 태자의 물건입니다.
당장 성인례를 위해 궁인들이 치장해주었을 텐데, 이런 물건을 떨어트리고 가다니요. 아무래도 그에게 전해주는 게 좋겠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날씨는 변함없이 화창합니다. 그러고 보니 태격궁의 가장 큰 서재인
현서원
에도 방문할 일이 있던가요?…태자의 처소,
화정당(華政堂)
도 연회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물건을 전해주는 게 어렵지는 않겠습니다.취향루(翠香樓)
에서 열릴 예정으로, 연회는 저녁쯤 시작될 것입니다.윤아라:(성인례까진 꽤나 시간이 남았으니. ... 현서원에 들렸다가, 태자를 보러 가면 될 것 같다. 권의 노리개를 잠시 품 안에 넣는다. 현서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현서원(賢書院).
일자로 길게 연결된 다섯 개의 전각은 왕가의 책을 보관하는 서원입니다.
이곳 서원에는 금서 구역도 존재하지만 보관된 대부분의 공간은 내각에 드나드는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어 서적을 자유롭게 대출할 수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한쪽에는 서고를 정돈하는
서리(書吏)
가 보입니다. 정리가 끝난 서고
에는 다양한 서적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깊은 복도 끝에는 금서 구역
이 존재하나,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설령 귀비인 당신이라도 말입니다.윤아라:(들어갈 수 없다 하니 호기심도 품지 않았다. 아라는 세상 흘러가는 대부분의 것들의 고분고분했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만. ... 상념에 젖어든 채 서리를 살폈다.)
서원에서 책을 관리하는 직책은 낮다면 낮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 서리는 요직에 들고 싶어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 현실에 안주한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현서원을 지키고 있는 당직 서리, 임서성(林瑞成) 역시 그 학식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나 중용받지 못하는 천재입니다. 그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총명한 사람이니, 만일 당신이 은혜를 베푼다면 언젠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겠지요.
말을 걸거나 회유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윤아라:... 책을 하나 찾으러 왔는데, 혹 찾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으실지요?
임서성:…아, 예에, 귀비 마마. 무슨 책을 찾으십니까? (책 정리에 여념이 없던 서리는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았다.)
윤아라:몽유국의 시초를 적은 책이었습니다만. ... 바쁘신가요? 위치만 알려주시면, 혼자 찾아보겠습니다. (두 손을 맞잡고 난처한 웃음을 그렸다.)
임서성:…아마 저쪽 서고에 있을 겁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당신의 난처한 웃음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서리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서고로 들어가 선반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당신에게 내민다.) 찾으시는 것이 이 책 맞습니까?
당신이 환휘전에 두고 읽던 책의 속편인 것 같습니다. 잘 찾아왔군요.
윤아라:... ... 감사해요. 혼자 찾았다면, 아마 밤을 꼬박 새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받아들며 환한 기색을 띄었다.) 그럼. 고생하세요.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 잠시 서고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아라는 금서 구역을 바라보나요?
윤아라:(시선이 향하게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금서 구역은 나라의 기밀이 숨겨진 공간이자, 안쪽에는 비밀스런 회합의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 후궁은 물론 어지간한 관리들도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침 누군가 안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지, 오늘따라 경계가 삼업합니다. 몇 사람의 호위가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은밀행동>을 시도하거나, 임서성을 회유하여 주의를 끌 수 있습니다.
윤아라:(내용을 엿들을 순. ... 없겠지?)
(하지만 정말 궁금하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 ...)
(그냥 현서원을 빠져나왔다.)
당신은 미련없이 현서원을 빠져나옵니다.
다음 갈 곳은, 태자의 거처, 화정당이었던가요.
윤아라:(품에서 살짝 노리개를 꺼내 살펴보았다. 다 컸나 싶더니. 이런 모습을 보면 아직도 어리구나, 싶은 생각이 나왔을지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태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화정당(華政堂).
화정당은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에서도, 그가 잠이 드는 가장 은밀한 침전입니다.
이권, 그러니까 태자는 영명제의 미움을 받아 이곳의 영화도 지난날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태자는 태자, 동궁은 동궁, 규모나 호사스러움만 두고 보면 다른 황자들의 거처에 비해 뛰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이날, 화정당은 물론 온 동궁의 종복들이 곧 열릴 태자의 성인례를 준비하는데 바빠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넓은 화정당은 사람이 적어 스산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습니다.
궁인들의 눈에 띄어 좋을 일은 없으니, 당신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물건을 두고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화정당 내부로 들어서면, 태자의 집무실로 쓰이는 정당, 탁상 옆에
화로
가 타고 있습니다. 흘긋 들여다본 침실에는 붕대
여럿이 떨어져 있고, 한쪽에는 무엇을 적었는지 모를 책자
가 놓여있네요.윤아라:(화로를 살펴본다. 아직 불씨가 있나? 방 안이 계속 따뜻한 편이 좋을 텐데.)
아라,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3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용이 새겨진 화로는 발이 세 개 달려있고 탄을 넣는 구멍이 작아 사용하기는 어렵지만 그만큼 안전해 보입니다.
기껏해야 곰방대에 불을 피우거나 몸을 녹이는 용도의 물건에 이만한 세공을 들이는 가문은 권세를 잡은 명문가나 이 황가뿐이겠지요.
어라? 잘 보니 안쪽에 타고 있는 종이 조각 여러 개가 보입니다. 조심스레 종이를 들어내면, 모든 종이에는 같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결국 산 자는 산 자의 길을 가고, 죽은 자는 죽게 마련이라. 아무리 홍연의 붉은 실로 두 사람을 엮는다 해도 그 인연은 오래가지 못하고 부수어지게 된다. 잘못된 시기에 맺는 인연은 차라리 맺지 않는 것만 못하다.]
윤아라:... (소설의 한 부분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자가 이런 걸 읽을 것 같진 않았다만. ... 그런데.)
(붕대라니?)
(아라의 표정이 대번 심각해졌다.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는 건가? 급한 손길과 함께 붕대를 살펴보았다.)
…침상 밑에 떨어진 붕대는 선명한 혈흔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태자의 침전…. 하지만 당신은 최근 태자가 아팠다는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친 사실을 남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이유라도 있었을까요.
윤아라:... ... (책자를 살펴본다.)
아라, <자료조사> 판정.
윤아라:
기준치: | 60/30/12 |
굴림: | 4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 책자는 다름이 아닌 태자의 진찰 기록입니다. 그를 담당하는 태의는 한 사람으로, 아무래도 태자와 특별히 친밀한 인물인 듯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기록이 벌써 궁을 뒤집어 놓았겠지요.
윤아라:... ...
안쪽에 쓰인 글씨가 빼곡합니다. 당장 올해 한 해만 하더라도, 태자는 최소 5번 이상의 독살 시도와 3번 이상의 암습을 겪었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입니다.
윤아라:(손이 차게 식더니, 이내 덜덜 떨려와서. ...)
(탁! 하고, 서책이 떨어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이 급해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조급하니 궁을 뛰어나와 주변을 살폈다. 권아! 태자. ... 성인례가 치뤄질 곳에 있는가? 화정당의 안에서 이권을 찾아보았다.)
태자는 이미 궁을 떠난 듯 합니다.
성인례가 준비되고 있을 곳으로 향하나요?
윤아라:(진정하자. 진정. ... 태자는 이를 감추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이, 섵부르게 행동하면. ... 노리개를 쥔 손에 힘이 파르르 들어갔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계속해 심호흡했다. ...)
(어느덧 조금이나마 진정되면, 그때에서야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겨우 진정한 당신은 취향루로 향합니다.
취향루(翠香樓).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널따란 전각은 황제와 대소신료들이 연회를 개최하는 장소입니다.
특히나 역사가 깊은 건물의 내벽에는 이 몽유국의 역사를 그려두었는데, 그림을 그린 화가의 실력이 남달라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자아냅니다.
천장에는 둥그런 달이 모습을 비추고 있어, 언제나 보름달만이 뜨는 몽유국의 신비로운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둥, 둥, 울리는 북소리가 연회의 시작을 알립니다. 당신이 들어서며 동시에 연회가 시작되는 듯 합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신료들과 비빈들을 굽어다 보는 자는 당신의 지아비, 영명제입니다.
당신이 취향루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두 가닥의 시선이 교차하며 입구를 향합니다. 엉킨 눈빛은 험험한 영명제의 것이고, 설킨 눈빛은 절절한 태자의 것이네요.
한 사람은 만인지상의 좌석에서, 한 사람은 입구에서 단장을 재정비하며 당신을 향해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냅니다.
이다지도 크게 울리는 연회의 음악 소리가 고요하게 느껴집니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아래,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당신을 속박하려 드는 영명제의 욕심을 이 하늘 아래 모르는 이가 있던가요? 자랄수록 맹목적으로 당신을 따르고 친밀감을 드러내는 태자의 행태는 궁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지 오래입니다.
소란스러운 적막을 깨트린 건, 다름 아닌 영명제의 한 마디였습니다.
황제:귀비. 이리, 옆에 앉으시게.
항렬만 따지자면 당신이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높은 좌석에 앉는 게 당연하겠지만, 황제의 자리에 함께 앉는 건 형편이 다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자에게, 당신을 향한 총애를 드러내고 싶은 것이겠지요.
궁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명제의 분부에 따라 당신을 그의 옆자리로 안내합니다. 그에 따라,
태자
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집니다.윤아라:... 예, 폐하.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옷자락을 들었다 놓으며. 안내하는대로 걸음을 옮기면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시선이 찰나에 닿았다. 태자. 그런데. ... 당신.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아라,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당신이 지나칠 때, 슬쩍 고개를 낮추는 태자의 움직임에 따라 정갈히 빗은 그의 머리칼이 흐트러집니다.
오늘은 태자의 성인식이 치러지는 날. 예법에 따라 그는 대례복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짙은 색의 장포는 위엄을 드러내고, 손에 든 상아홀이 더욱 경건한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찡그린 그의 표정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고…, 당신은 생각합니다.
성인례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태자는 정당에 들어섭니다.
마침내 세 종류의 관을 쓰고 단에 오른 태자는 제법 늠름한 모습입니다. 그의 손이 차례로 황가 어른들의 잔을 채웁니다.
감회가 새롭달지…. 손을 뻗고 있으면 태자가 곧 당신의 앞에 서고, 먼저 당신의 잔에 술을 따릅니다.
등화 아래 은근히 오가는 시선, 당신 곁에 앉은 황제 못지 않은 열렬한 눈빛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와중에도 그는 당신의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놓아줍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당신이 자신에게 술을 넘겨주길 기다리며 잔을 들고 서 있습니다.
윤아라:... ... 태자. (손을 잡았다 놓는 행위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눈을 내리깔아 당신과 마주하지 않으며. 단정한 몸짓으로 술을 따랐다. 당신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인다.) 주의하세요. (그러나 옆에 앉은 황제에게까지 그 음성이 닿았을지는. ...)
이권:…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띄며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가 귀비, 당신의 옆을 스치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속삭입니다.
이권:…연회 후 애련지(愛蓮池)에서 잠시 뵙고 싶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애련지는 태자가 머무르는 동궁에서 멀지 않은 연못으로, 그 이름만큼이나 많은 연꽃을 심어선경과 같은 절경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내 태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황제의 앞에 서서 그가 따르는 술을 받아 마십니다.
이로서 술을 돌리는 절차가 모두 끝이 납니다. 문무백관이 표면적으로나마 태자가 성인이 된 오늘을 축하하고 각종 공연이 펼쳐집니다.
무희의 손끝에 휘날리는 긴 소매자락에 모두들 주의하고 있지만, 당신은 아래에서부터 쏘아지는 태자의 시선을 연회 내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영명제는 연거푸 당신에게
술
을 권합니다.아라, <정신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79 |
판정결과: | 실패 |
맹렬히 식도를 타고 흐르는 열기에 당신은 연거푸 쿨럭 소리를 내었습니다. 금방 손발이 따끈해지고, 괜히 땀이 납니다. 벌써 기분이 나아지는 게, 독하긴 독해도 좋은 술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정신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98 |
판정결과: | 실패 |
위까지 뜨끈히 달아오르게 하는 독주에 당신은 맥을 차리지 못합니다. 눈앞이 핑 도는 듯 하지만, 다행히 아직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말수가 늘고 말실수도 따라 늘어납니다.
<정신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1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네번째 <정신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1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마지막 <정신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3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럭저럭 이성을 유지한 채 술자리는 끝이 납니다.
밤이 짙어지면 비로소 연회에 몰려든 대신들도 집으로 돌아갑니다. 영명제는 한 나라의 천제고, 오늘 많은 술을 마셨으니 궁인들이 그의 몸이 상할까 두려워하며 침전으로 그를 모십니다.
곧 당신의 궁인들도 당신의 팔을 잡아 부축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전담 시녀가 당신에게 묻네요.
: 침전으로 모실까요, 마마?
윤아라:... ... 아니, 아니다. 그것이. ... ... 음. (눈을 몇 차례고 계속 깜빡였다.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걸음이 휘청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실제로 그랬던가?) 애련지로. ... 가야. ...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 ... ...
시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였으나, 당신의 바람대로 애련지를 향해 부축합니다.
애련지(愛蓮池).
동궁에서 가까운 이 연못은 가시연꽃을 가득 심어 그 모습이 신묘합니다.
넓게 펼쳐진 연잎 아래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연꽃
이 파아란 달빛을 받아 물에 젖은 미인처럼 투명하게 속을 내비칩니다.줄기 사이를 헤엄치는 비단잉어는 저리도 신이 났는데, 태자는 씁쓸히 미소지은 채 궁인 하나 거느리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못에 <교육> 판정.
윤아라:
기준치: | 60/30/12 |
굴림: | 3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못을 가득 메운 이 연꽃이 혹서, 즉 8~9월에나 피는 꽃이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겨울에서 봄으로 지나가는 시기, 꽃이 필리가 없습니다.
이 지식은 당신이… …. 언제 얻은 지식이었죠? 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몽유국의 못에는 사철 연꽃이 피어있으니, 애련지에 늘 연꽃이 만발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요.
다시 앞을 보자, 태자는 어느새 당신의 궁인들에게도 넉넉히 은자를 주고 그들을 물리고 있습니다.
천천히 당신의 뒤로 다가선 태자는, 귓가에 나지막이 음성을 울립니다. 귀를 스치는 목소리가 닿지도 않은 입술을 대신하여 살갗을 간지럽힙니다.
이권:제가 마마를 놀라게 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낮은 음성이다.)
오늘은 그저…. 사적으로 다시 한번 축하를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윤아라:... 그러고보면, 태자. 시간이 없어서 돌려주질 못하였는데. (그래, 무엇이 이상한가. 몽유국의 못에는 사철 연꽃이 피어있고, 태자 또한. ... 품 안에서 당신이 떨어뜨렸던 노리개를 꺼내었다. 당신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간다. 술기운에 자연스레 미소가 짙어진다.) 이것을 떨어뜨린 것을 보나, 사적으로 축하를 받고싶다고 이야기하나. ... 아직도 제 눈엔 한참 어리기만 하십니다, 태자. ... (권아. 무척이나 작은 속닥거림은 웃음소리와 바람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을까. 아라는 손수 당신이 떨어뜨린 노리개를 걸어주었다.)
이권:(손수 노리개를 걸어주는 당신의 모습을 조금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제 이름을 부르는, 당신의 옅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얼마 간 말이 없었다. 그는 당신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 한 번으로 단숨에 헛된 환상 속에 사로잡힌다. 쓴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소자가 이미 성년이 되었는데도 그리 보십니까. 귀비 마마. (노리개를 거는 당신의 손을 붙잡아 쥔다. 아주 소중한 이를 대하듯이 부드러운 손길. 지나치게 친밀하게 구는 접촉이었다.) 그렇다면, 어리광을 받아 주세요. …오늘 하루가 소자에게 퍽 고되었습니다. (어느새 굳은살 단단히 배겨 있는 손 끝이 틈 사이를 파고든다. 자연스레 손가락이 맞물리며 깍지를 꼈다. 짙은 눈길로 당신을 내려다본다.)
윤아라:아직도 챙겨줘야 할 점이 보이고, 아껴주고 다정해야 할 마음만이 드는 것을 어떡합니까.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이야기하면, 어느덧 제 손을 붙잡아오는 손길이 있었다. 아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짙고, 또 짙은 눈동자. 그것에서 배어나오는 감정이 도통 무엇이었는지..., 아라는 알 수 없었다.) 태자. 그러나. (맞잡은 것 위로 남은 한 손을 올린다. 고개를 내려 그것을 바라보며 참 귀중한 것을 쓰다듬듯 당신의 손을 쓸어주었다. 느릿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어리광을 받아주기 전에, 쓴 소리를 좀 해야할 것 같습니다. (표정이 조금 아픈 듯 찌푸려졌다.) 태자. 왜. ... ... 다쳤던 것들을 제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숨이 턱 틀어막히는 기분.)
이권:…마마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듣는다. 제 손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참 다정스럽다.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욕심을 품게 할 정도로. 그러쥔 당신의 손을 힘주어 붙잡는다.) 어찌 아셨습니까. 혹 태의가 가볍게 입을 놀리기라도 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당장이라도 의관을 바꾸어 버릴 것 같은 눈치였다. 당신의 찌푸린 미간에 오히려 그가 안타까운 낯을 했다. 권은 당신에게로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부디 심려치 마십시오. 마마께서 그런 얼굴을 하실 줄 알아 감춘 것입니다. …그리 힘들어하시면 제가 마마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윤아라:... 압니다. 아는데, 결국 또 이리. ... 마음이 서글퍼지고 맙니다.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에도 그랬다. 속이 어지간히 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티내기라도 하듯 말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노리개를 돌려주러 태자의. ... 방에 들렀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붕대가, 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성 싶더니 눈을 마주쳐온다. 당신의 말에도 얼굴이 한참 굳어 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태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폐하께 대적. ...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지 간에.
이권:…마마. (권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움직이려다 멈추었다. 고개 숙인 당신은 찰나의 흔들림을 볼 수 없었겠으나. 당신의 말이라면 대부분 쉽게 순응하던 권은 이번만큼은 어떠한 긍정도 돌려주지 않았다. 편치 못한 시선으로 깨물린 입술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피할 수 없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대꾸하는 목소리는 당신을 달래려는 듯 부드럽다.) 폐하께서도 당장 저를 어쩌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염려 마세요.
(말을 맺은 뒤에는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시선을 마주한 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연다.) 그럴 수 있다면… 오늘 마마를 제 곁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감히 태자가, 황제의 귀비를 향해서는 위험한 발언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권은 가라앉은 낯으로 서슴없는 말을 뱉어낸다. 서늘한 열기가 어린 시선이 당신에게로 닿았다. 그는 천천히 당신의 뺨 가까이로 손을 뻗는다.) …잎사귀가 붙었군요. (거친 손끝이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당신의 뺨을 훑어내며 귓가로 향하여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 준다. 체온 높은 손이 느릿한 속도로 귓가를 덧그리다가 목덜미를 스쳐 지나 떨어졌다. 잎사귀 붙었다는 말과는 달리, 다시금 멀어지는 것은 빈 손이다.) 오늘 어여쁘십니다. 귀비… (흡사 황제와 닮은 부름으로,) …마마. (익숙한 칭호는 한참의 간격을 두고서 따라붙는다.)
윤아라:(그 순간. 아라의 낯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굳어졌다. 입술이 떼어지나 감히 흘러나오는 말 없다. 다만 아라는 부드럽게 권의 손을 떼어낸다. 질책하듯 첫 마디가 떨어졌다.) 태자. (들이키는 숨.) 진심으로. ... 말하는 겁니까? 진심으로, 지금, 폐하께 대적하겠다고, (안색이 더욱 창백해질 때였다.)
... ... 태자! (그러나 뻗어져오는 손을 치워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심장이, 서늘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하지만. 정녕 차가울 뿐이었나? 손을 뿌리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뺨을 훑어내다 귓가를 스치고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귓가를 매만지다 목덜미를 스쳐 떨어지는 손에 잎사귀가 없는 것을 보았음에도 뒬걸음질 칠 수 없었다. 아, 아. 벌린 입술에서 한숨과 비슷한 무언가가 흘러나왔을까. 술 기운 때문인가. 아직은 차디 찬 밤 공기 때문인가. 얼굴이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지는데. 자신이. 당신에게. ... 그럴 리가. ... ...) 대체, 언제부터. (두 다리에 당장이라도 힘이 풀릴 것만 같아 호흡을 진정시켜야 했다. 주먹에 꾹 힘을 주며 어지러움을 물리려 힘썼다. 황급히 당신의 손이 스쳐지나갔던 목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욱신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 ... 천하가 지탄할 패륜입니다, 태자. 금방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몸을 돌려야 했다. 몸을 돌려야. ... 하나 결국. 아라는 발을 뗄 수 없었다.)
이권:…송구합니다. (조용히 대답한다. 그러나 좁힌 거리를 벌리지는 않았다.)
눈앞의 태자는 확실히 영명제와는 다릅니다. 영명제는 당신에게 집착을 보이고 선물을 보내지만, 태자가 당신을 대하는 열성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이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당신은 황제의 귀비인데, 태자는 이따금 당신을 어버이가 아닌…, 연인처럼 대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수심에 잠겨있던 그때, 칠흑 같은 어둠을 가로지르고 번쩍이는 금속이 당신과 태자를 향해 날아옵니다.
이권:…아라!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 태자는 빠르게 당신을 끌어안고 주변의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손으로 당신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암습입니다!
마땅히 호위를 불러야 하건만, 태자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저으며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게 두지 않습니다.
이권:…저를 향해 온 살수들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면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담담히 상황을 고하는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리는 건, 착각일까요?
곧 태자는 당신의 손을 끌고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똑똑히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두 사람을 뒤쫓고 있습니다.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날카로운 화살이 태자의 목을 향해 몸을 뻗어옵니다…!
윤아라:... ... 태자, ... !
(대신 화살 앞에 끼어들었다. 눈을 급하게 감았다.)
아라, <민첩> 판정.
윤아라:
기준치: | 50/25/10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당신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려 화살이 향하는 자리를 막아섭니다.
그리고, 푹, 소리와 함께 화살이 당신의 등에 적중합니다. 있는 힘껏 당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촉은 깊고 깊게 몸에 파고듭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 설상가상으로 공중에 단맛이 돌기 시작합니다. 훈향은 잘 쓰면 몸에 이롭지만 반대의 경우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일까요, 여러 자객이 점점 두 사람을 향해 거리를 좁혀 올 때에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고개를 올려 이권을 보면, 그는 천을 찢어 코와 입을 막은 채 살수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
.
.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들려온 건…. 잔잔히 파도치는 물소리.
힘이 빠진 팔은 들어 올리기도 어렵습니다. 필시, 아까 마신 연기가 아직 작용하고 있는….
응? 당신은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나신으로 뜨거운 김이 나는 물속에 뻗어있는 당신의 몸에서 핏자국을 지워내고, 머리를 헹구며 목욕 수발을 들고 있는 사람은….
이권:…이제 깨셨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은 태연합니다. 태자, 태자가…! 누군가의 눈에 띄면 극형을 당하고도 남을 상황입니다.
태자는 당신을 안심시키며, 손가락 한 개를 당신의 입술 위에 누르고 입을 단속합니다.
이권:…해가 뜨기 전에는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말이 새어 나가겠습니까?
윤아라:... ... (몸이 들썩이듯 떨렸다. 황급히 당신의 손을 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 ...
태, ... ...
... ... ... 태자.
이게, 무슨.
무슨. ... ... ...
놀라서 몸을 일으키던 당신은, 곧 자신의 몸에서 상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라, SANC 0/1D2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87 |
판정결과: | 실패 |
rolling 1d2
()
1
1
이권:…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암습을 숨겨야 하여 다른 이를 불러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퍽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당신의 팔 위에 묻은 핏자국을 마저 닦아내었다. 시선은 당신으로부터 조금 빗겨 나간 채로 바닥을 응시한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근 채 흉 하나 남지 않은 당신의 몸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자잘한 상처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윤아라:... ...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아니. 태자. 어찌 아녀자의 몸을, (호흡이 단숨에 가파라지는 것은 몸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일지, 뭘지. 아라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암수, 그래요. 암수가. 하지만. ... ... (덜덜 몸을 떨며 팔을 떨쳤다. 심호흡을 몇 차례고 했다.) ... 이곳은 어디며, 지금. 무슨 일이 있었으며. ...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권:… (당신의 떨리는 몸을 바라보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선다.) 살수들이 훈향을 사용하여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화급히 상처를 살피고 피 묻은 자국을 닦아내야 했기에 부득이하게 화정당의 욕실로 모셨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했다고 하나… 여인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댄 것은 사죄드립니다. 다만 마마께서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차분한 설명을 이어가며 그는 날카로운 칼날에 찢어져 너덜거리는 겉옷을 벗는다. 여전히 당신에게는 등을 보인 채로 상반신을 전부 탈의하고서 붕대를 들어 핏물이 배어나는 상처 위로 익숙하게 감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깨셨으니 걸칠 옷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마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윤아라:... ... (그런 당신의 등 뒤를 보았다. 빼곡히 상흔이 남은 것 위에 붕대를 감아내는 손길은 익숙했다. 왜. 그래선 안 됐는데. 가슴이 저리듯 아팠다. ... 물기로 축축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한숨을 억누를 뿐이라 폐부가 욱신거렸다.) 태자. (무릎을 끌어안아 그 위에 이마를 기댄다. 나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건만 쏟아져내리는 상황이 몹시도 버겁다.) 저는 폐하의 여인입니다.
이권:… (조용히 움직이던 손이 당신의 말에 멈칫했다. 짧은 대꾸가 돌아온다.) 허나 연인은 아니시지요. (그는 약간의 치기로 한 마디를 뱉어냈다. 금방 후회했으나.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멈추었던 손을 움직인다.) 마마께선 폐하를 사랑하십니까. (마치 그렇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다. 당신이 알았다는 사실을 그 역시도 알았기에, 더는 그 목소리에 서린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 노골적인 애정.)
윤아라:태자. ... 권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가 너를, 아들처럼 여겼던 것을, ... 정녕 모르느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나.)
이권:…한 순간도 그대를 어머니라 여겼던 적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아프게 저며 왔다. 자신의 말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끓는 음성으로 내뱉는다.) …저는, …… (아주 오래 전부터, 너무 긴 시간동안, 당신을 그저… …. 고해하지 못할 말들을 입 안에서 되새긴다. 잠깐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느리게 힘을 풀어낸다.) …이곳은 제 침전과 연결된 욕실입니다. 제 허락 없이는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잠긴 목소리로 대꾸하며 그는 몸을 돌렸다. 핏물 젖은 손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고서 문가로 다가간다.) 그러니 편히 쉬십시오. 입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윤아라:(당신이 문가로 다가가는 내내, 또 바깥으로 나가서기까지. 아라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기척이 아주 멀어지면 웅크린 등이 자그맣게, 떨려오는 것이었다.)
... ... 하,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키면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죽 흘렀다. 물에 젖은 손으로 다시금 얼굴을 닦아내었다. ...)
목욕물은 식은 지 오래입니다. 보름달도 수줍은 듯 수풀 뒤로 몸을 숨기는 이 밤, 오로지 태자만이 당신의 곁에 머무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덧없게 마련입니다. 언제까지고 그의 침전 깊은 곳에서 몸을 숨길 수는 없겠지요, 그래요, 언제까지고, 단꿈에 빠져 당신의 신분을 망각할 수는 없습니다….
03. 월만엽취부지시(月滿葉翠不知時)
달이 둥글고 잎이 푸른 경치에 빠져 시간을 잊는다 하더라도.
영명 19년, 마지막 날.
한 해의 마지막 날. 황가의 사람들이 모인 ‘가족 연회’는 일찍이 끝이 나고, 당신은 홀로 환휘전에 돌아옵니다.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호위들은 당신의 명령을 듣는 자들이 아닙니다. 몇 번, 몇 번이나 더 태자가 당신을 몰래 찾았을까요. 우연하게 만남을 들킨 후로, 황제의 시선은 더욱 따가워졌습니다.
그는 더는 태자와 당신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영명제는 분명 당신과 그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의혹을 산 후로 당신의 삶은 고달파졌습니다. 홀로 정원을 걸을 때조차 곳곳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다시 한번, 이 궁중에서 당신은 외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 궁궐의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럴 때조차, 태자의 시선이 떠오른다면, 그는 당신을 홀로 두지 않을 것만 같다면, 이는 단지 당신의 백일몽일 뿐일까요.
똑똑,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시위들은 어찌하고? 이렇게 늦은 시각, 예의를 제치고 당신을 찾아올만한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연 자리에는 이권이 조용히 웃음 지은 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도 당신을 향한 태자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늘 그랬듯이 다정하고, 친밀합니다.
더는 당신을 '어머니'처럼 대우하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그 미묘한 변화를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과 태자를 제외한다면요.
등 뒤로 번진 둥근 달의 노란 빛이 일렁입니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이 두 사람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를 가릅니다.
이권:걱정 마십시오. 아랫것들은 전부 재워뒀습니다.
옆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곳에는 과연 호위들이며 궁인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겨우 당신을 보자고, 또 이리 무모한 짓을 벌였던가요? 일국의 태자라는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화라도 낼까, 그를 다시 보면, 또다시 이마 정중앙에 박힌, 당신이 옛날 그려줬던 것과 같은 모양의 화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다지도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러니 궁중 다른 세력들이 그를 얕잡아 보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이 적부터,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이권:…오늘 밤 달이 제법 아름답습니다, 마마.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윤아라:... ... (등을 돌렸다.) 돌아가세요, 태자. 폐하께서 노하실 텝니다.
이권:잠시라도 좋습니다. (돌아서려는 당신을 붙잡았다. 퍽 간절한 음성으로.) 오늘 하루,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제 혼처를… 결정하겠다고 하십니다. (어느새 목소리가 갈라졌다.) 더는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그저 인사라도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윤아라:(등을 진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을 아라의 앞. 손이 치맛자락을 꾹 쥐어냈다. 소리 없는 들이쉼과 내쉼이 두 번. 천천히 몸을 돌려 당신을 보았다.) 잘. ... 되었습니다. (나의 표정은 담담한가. 그러길 바랄 뿐이다.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 ... 하고픈 말이 있으십니까. (무언의 허락을 표했다.)
이권:(그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다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윤아라:(마지막. 그 단어가 유독 귀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정말로, 정말로.)
... 긴 시간은 아니됩니다, 태자. (손을 붙잡았다.)
이권:…(붙잡는 손길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다. 당신은 여전히도 다정했다.)
태자는 긴 장옷을 꺼내 당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달 아래 몰래 당신의 손을 붙잡은 채 무턱대고 오솔길을 헤치며 걷기 시작합니다.
야심한 시각, 당신들의 발걸음 소리밖에는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주위는 조용합니다.
혹은 그 고요 속에 누군가의 심장 박동이 섞여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권:아십니까.
그렇게 운을 뗀 태자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까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겠다고 하더니요.
이권:…아바마마께서 사람을 묶어둘 만한 가벼운 수갑을 만들어오라 하셨답니다. 금으로 덧칠해서, 보기에도 아름답게…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그 음성에서는 희미한 분노가 비칩니다. 수갑이라고? 당신은 이미 반쯤 연금되어 지내고 있습니다.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후궁을 수갑으로 동물처럼 묶어둔단 말입니까. 그는 애정이 아니라 치욕입니다. 태자가 하는 말이 사실일 리 없습니다.
당신이 대답할 새 없이,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춥니다. 뒷길을 따라 걸은 지 오래, 두 사람은 어느새 태자의 침전인 화정당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윤아라:... ... 태자.
화정당은 태격궁 안에서 태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많지 않은 장소입니다.
태자
는 불안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다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이야기합니다.이권:…송구합니다.
아라, <심리학> 판정.
윤아라:
기준치: | 60/30/12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당신은 태자가 고통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깊은 아픔이 서려 있는 눈동자, 떨림을 감추려 단단히 쥐어진 주먹, 꾹 깨물린 입술….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가요.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고 당신을 바라보는 그가, 어떤 죄책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이권:이것만큼은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내내, 사모했다고….
아라, <정신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6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옵니다. ‘사모했습니다’, 하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고백과 함께 파고든 예리한 통각이 어떤 환상을, 어떤 기억의 파편을 당신의 머릿속에 흩뿌립니다.
누군가의 입술이 떠오릅니다. 누군가의 웃는 모습이. 누군가의 또 다른 고백이. 그 누군가가 했던, 당신을 향하는, 애정을 그리는 낱말이….
그 사람은 누구였죠? 시야가 반전되었다가 돌아올 때는 이권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방금, 당신이 보았던 것은 누구의 기억입니까?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인 아라, SANC 0/1.
윤아라:
기준치: | 74/37/14 |
굴림: | 2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무엇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대체, 태자. ...
이권:……
대답 없이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깊은 절망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 이렇게 커버렸을까요? 태자는 언젠가부터 치기를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희한하리만치 당신에게 호의를 보였습니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조금도 변하지 않은 당신이건만, 그의 고백에 어떤 심통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등줄을 타고 흐르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당신을 충동질합니다. 울듯이 웃는 그를 위로하고, 그의 감정을 받아들이라고. 당신의 신분 따위는 잊고, 받아들이라고….
이권:…제게 마마의 남은 하루를 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더는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손을 붙들었다. 갈무리되지 못하여 강한 힘이 들어간다.) 단 하룻밤이면 충분합니다.
윤아라:태자. 대체 어떤 꿈을, 꾸고, 계십니까, ... (이제는 통증이었다. 이 설레임은, 충동은, 아픔이라고. ... 울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나. 대체 언제부터 당신의 시선이 그러했나. 화전을 그려줄 때부터였나.) 저는 감히 태자의 생각을 엿볼 수 없군요.
태자. 나는. (그렇게 충동을 져버렸다.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에서.)
... 폐하가 원하신다면. 수갑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 ... (거짓을 속닥였다.)
이권:…… (당신의 대답에 이권은 쓰게 웃었다. 낯선 말투로 거친 음성을 속삭인다.) ……네가 그럴 이유가 없다, 아라.
(그리고 아주 짧은 간극. 어느새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송구합니다, 마마. (이유 모를 사과의 말을 끝으로 그가 당신의 뒷목을 강하게 내리친다.)
둔탁한 통증과 함께, 당신의 시야가 까맣게 흐려집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눈을 떠보면 낯선 곳입니다. 아니… 낯설지 않습니다. 이 곳은 태자의 궁. 화정당의 침소 안입니다.
그래요, 태자가 당신에게 고백하고, 그를 거절한 당신을 기절시켜…. 아, 어제의 기억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갑니다.
창밖으론 어느새 희미한 햇살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바깥
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합니다. 문
은 굳게 닫혀있고, 궁인들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주위에 얼씬대지 않습니다.윤아라:(단숨에 얼굴이 백짓장마냥 새하얘졌다. 굳게 닫힌 문으로 반쯤 내달리듯 가 문을 열어본다.)
굳게 닫힌 문은 아무리 당겨도, 밀어도, 열리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문을 잠가버린 모양입니다.
소리를 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태자는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가둬둔 겁니까? 설마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화정당에 당신을….
윤아라:(심장이 불안으로 쿵 쿵 뛰었다. 삐걱이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스스로조차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추측하자면. ... 두려움에 찬 표정이 아니었을까.)
놓아주세요, 태자. ... ... (중얼거리듯한 음성만이 겨우 새어나갔다.)
당신의 혼잣말은 허공에 공허하게 울려 퍼집니다.
바깥에 <듣기> 판정이 가능합니다.
윤아라:
기준치: | 70/35/14 |
굴림: | 81 |
판정결과: | 실패 |
... 태자. 놓아주세요, ... 태자!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쳐도,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주변에서는 사람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은 신년 연회가 일찍부터 열리는 날, 이제까지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영명제는 곧 당신의 실종을 알아차릴 겁니다. 수습을 하려면, 되는대로 일찍 환휘전에 돌아가야 합니다.
방안에는 길쭉한
탁상
이 보입니다. 창문
의 빗살 틈으로 내리쬐는 햇볕만이 아침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벽에 걸린 산수화
는 익숙한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윤아라:(한참을 멍하게 서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탁상을 향했다. 나갈 수 있는, 나갈 수 있게 할 만한 것이. ... 없나? 손이 조금 떨렸다.)
탁상 위에는 가지런한 글씨가 적힌 죽편이 가로 놓여있습니다. …태자의 필체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부터 당신을 가둬둘 생각이었군요. 죽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란을 피우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곧 악몽이 끝날 겁니다.’
윤아라:... ... (앞으로의 나날이 악몽이 아닐 것을, 악몽이 거둬질 것을. ... 당신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는 말이다.)
(창문을 바라본다.)
아라, 창문에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14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당신은 창문의 좁은 틈새로 밖을 관찰합니다.
허! 창의 바깥쪽까지 나무를 덧대었군요. 이날을 위해 준비해왔던가요, 태자? 대체 뭘 위해서?
…창틈으로 내려다본 바닥에, 말굽과 사람 발자국이 촘촘히 나 있습니다. 시녀들이나 태감들이 이 정도로 많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이 발자국은 마치, 마치…. 많은 인원의 군대가 지나간 흔적….
윤아라:... 아니야!
아닐거야, 이게. ... 아닐거야. ... ! (고개를 돌리다 못해 아예 창문을 등지고 섰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권아, ... 권아. 대체 왜 이래. 무엇을 꿈꾸고. 대체, 왜. ... (모든것이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혼잡한 눈이 산수화를 훑는다.)
아라, 산수화에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98 |
판정결과: | 실패 |
산수화는 진귀한 동물들이 후원을 노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의 주가 되는 배경은, 당신에게 아주 익숙한 모습입니다…. 이 장소는, 당신이 하사받은 후원이네요. 당신과 태자가 처음으로 조우했던 장소 말입니다.
하늘에 작게 나는 연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관찰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5/37/15 |
굴림: | 11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문득 손이 연을 향하고, 달칵. 당신이 위로 손을 대자 멀쩡했던 벽에 틈이 생기고 옆으로 밀려납니다. …비밀 통로입니다.
좁고 어두운 통로는 바깥에서 그 끝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태자의 처소인 화정당 내부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데 놀라고 맙니다.
여러 해, 태자는 그저 핍박받는 황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명제의 뜰인 태격궁에서 이런 장소를 마련했다는 건 그간 그가 다른 의중을 품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태자는 귀비인 당신이 이 장소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했을까요? 그는 당신이 자신의 비밀을 헤쳐주길 바랐을까요? 아니면 영영 알아내지 못하길 바랐을까요.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는, 무섭도록 새카만 어둠이 회랑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벽을 짚고, 손안의 감각에 의지해 한 걸음씩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침내 희미한 등불이 멀리서부터 은은한 광을 뿜어냅니다.
비로소 나타난 공간은 외부에서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넓었지만,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후원의 삶이 겉은 찬란하나 속은 병 들어 있는 것처럼, 꿈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가혹한 것처럼.
가구가 많지 않은 방의 중앙 벽에는 황궁의
배치도
가 걸려 있고, 그 밑에 길게 뻗은 문갑 위에는 고서
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습니다. 구석에 서 있는 책장
은 오직 하나의 서랍에만 자물쇠가 걸려 있습니다. 반대편에 세워진 의걸의장
은 무언가 어색하게 보입니다.윤아라:(금방이라도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배치도를 보았다.)
<지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70/35/14 |
굴림: | 73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70/35/14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고개를 들어 이제는 익숙하기만한 황궁의 배치도를 살펴 봅니다.
이 배치도는 무척이나 세밀하여, 궁중 호위가 드나드는 통로는 물론 지밀나인들과 태감들의 교대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습니다. 궁궐 여러 장소 사이를 잇는 최단 통로까지….
…단지 궁중의 배치를 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로 세밀한 표시를 해둘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깨닫습니다. 이는 궁궐을 습격하기 위해 연구한 흔적입니다. 태자는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아라:(고서를 다급히 펼쳤다. 아니야. 반란이라니. 아니야, 네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네가 그랬을 리가 없어!)
<자료조사> 판정.
윤아라:
기준치: | 60/30/12 |
굴림: | 5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총 세 권의 고서가 놓여있습니다.
윤아라:(첫 번쨰 고서를 본다.)
첫 번째 책의 이름은 '몽국유람기'.
언제 써졌는지 모를 이 서적은 시간에 닳아 종이마저 누런빛을 띄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종이는 바스러지고 말 것입니다. 분명 이전에 살펴본 사람도 이 책을 조심스레 넘겼겠지요.
그러나 이 책의 가치가 이렇게 보관할 정도로 높은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이 유람기의 문체는 수려하기는커녕 평균적인 기준에도 미달이라 부를 정도로 조악하고, 내용 역시 평범한 상인의 일기입니다. 안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죽을 만큼 큰 외상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나는 매우 기묘한 나라에 와 있었다. 내 몸에 있던 상처는 이미 다 나아 있었다. … …. 이곳은 바깥의 세상과 꼭 닮은 모양이지만 언제나 같은 달이 뜨고, 푸른 잎사귀는 한동에도 메말라 떨어지지 않는다. 보름 동안 나의 머리와 손톱은 조금도 자라지 않았으나 이곳의 사람들은 이 상황이 무척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여관의 방을 빌릴 돈이 없는 나는 몸에 지니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 인근 마을에서 팔려던 장신구 따위를 이곳 사람들에게 팔아 비용을 마련했다.
윤아라:... ...
(두 번째 고서를 본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던가요. 설마, 그렇다면, 정말로 이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라, SANC 1/ 1D3.
윤아라:
기준치: | 74/37/14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흰색의 비단은 쌓여있는 책더미들과는 다르게 최근 쓰인 것처럼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둘둘 말린 겸백을 펼치면, 거기에는 여러 번 수정한 듯 고뇌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글이 보입니다.
“…가까스로 황제라는 작자의 눈을 피해 조사한 결과, 나는 이 장소가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됐다. 황제 역시 내가 바깥의 삶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다. 요즘 들어 그녀에게 친밀감을 보인 후에는 반드시 화(禍)를 입으니 이는 영명제가 내게 경고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꿈속의 존재와 인연을 맺은 그녀는 쉽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일단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녀와 황제의 친밀한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나도 이 환몽에서 깨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구나.”
…. 이 필적은, 분명 당신이 태자의 방, 탁자 위에서 보았던 글씨와 일치합니다.
윤아라:... ... 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마지막 고서를 보았다. ...)
이 서적은 다른 책들과 다르게 짐승의 가죽으로 표지를 감싸 더욱 장중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아니, 차라리 음험하다고 할까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당신을 엄습합니다.
서적을 펼치면, 여러 번 보았는지 바로 열리는 쪽에 아주 괴상한, 여러 끈적이는 구체를 몸에 단 괴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지렁이 기듯 불분명한 글씨가 어째서 당신에게 읽히는지, 몸서리쳐지는 와중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꿈의 인도자요 모든 악신과 같이 제물을 바라는 존재라. 유혹에 빠진 자는 현실에 돌아오지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소원을 쫓아 악몽에 갇히리라. 애초 원하는 바를 이뤄주지 않는 꿈이건만, 하늘 아래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반드시 합당한 값을 치러야 한다. 제때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의 결말은 언제나처럼 참혹할 뿐이다.”
발목부터 기어오르는 불쾌한 감각이 당신을 옭아 묶는 듯합니다.
모독적인 신앙의 기록을 발견한 아라, SANC 1/1D4.
1만큼의 크툴루 신화 점수를 획득합니다.
윤아라:
기준치: | 73/36/14 |
굴림: | 87 |
판정결과: | 실패 |
rolling 1d4
()
3
3
... (책장을 보았다. 다 꿈일거야. 그래, 여기에 적힌 단어처럼, 다, 꿈. ... 이라면. ... ...)
<근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45/22/9 |
굴림: | 2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유일하게 닫힌 서랍을 연 당신은 안쪽에서 화첩(畵帖)을 한 부 발견합니다.
솔직히 말해 이 화가의 솜씨는 아주 뛰어나다 할 수 없지만, 안의 내용은 어쩐지 정겨운 기분을 불러일으킵니다. 덧없는 운우지정을 그린 화첩은 아마 비싸게 팔리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연인의 마주 보는 낯이, 꼭 얽힌 손이 보는 사람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한 장, 한 장, 그림을 넘겨 끝에 다가갈수록, 그림의 분위기는 엄중해집니다. 화첩의 마지막 장, 정답던 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 사람만 남아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툭, 하고 물방울이 종이 위에 번져 듭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천장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설마 싶어 짚은 뺨이 축축합니다.
…당신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귀비, 아니, 아라. 어째서 당신은 울고 있습니까?
지금 느끼는 저릿한 아픔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서툰 그림에 울 정도로, 당신은 여린 사람이던가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당신은 이 그림과 특별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점차 굵게 떨어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이 여름철 장대비와 같이 거세기만 합니다. 문득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손이 떨려 옵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요?
윤아라:(몰라.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다고. ... 힘없이 중얼거렸다. 손등으로 눈물이 흘러나오는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한숨을 닮은 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이유 모를 울음에 젖어있을 시간도 없다. 의걸의장을 살핀다.)
<근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45/22/9 |
굴림: | 49 |
판정결과: | 실패 |
이런 곳에 멈춰설 수 없습니다.
다시, <근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45/22/9 |
굴림: | 50 |
판정결과: | 실패 |
... ... 하.
무거운 의걸의장을 밀어내는 손바닥이 온통 부르틉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야만 합니다. 보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근력> 판정.
윤아라:
기준치: | 45/22/9 |
굴림: | 1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온 힘을 쏟은 끝에 간신히 의걸이장을 옮기면, 아니나 다를까 겨우 사람 하나 드나들 만큼 작은 구멍이 눈에 띕니다.
어느새 바깥은 어두워졌으나,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이 구멍을 통해 밖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윤아라:(마지막으로 눈물을 고쳐 닦았다. 그 아이를. ... 만나야 했다. 바깥으로 나가자.)
04. 몽유입시만필성(夢有入時晩必醒)
꿈을 꾸다보면 늦게라도 반드시 깨야 할 때가 오고야 만다.
영명 20년, 신정(新正).
아니, 당신의 꿈속, 언제나와 같은 하루.
벽을 빠져나오고,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기도 전에 달라진 대기를 당신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폭풍전야, 유달리 무거운 분위기가 당신을 압도합니다.
어째서 이 궁은 이렇게 스산한가요? 어째서 이 숲은 이렇게 푸르른가요? 매섭도록 가까이 밤하늘을 채운 달빛이, 어째서 이렇게 섬뜩합니까?
닫힌 방에서 빠져나왔을 때, 가장 먼저 당신을 반기는 저 하늘, 저 달이, 정말로 당신이 알던 것과 같던가요?
당신, 당신을 모시던 궁인들의 얼굴을 기억하던가요? 영명제의 외관이 떠오르던가요? 어째서 모든 기억은 이다지도 흐리고 모호합니까?
영원히 보름달에 갇혀버린, 계절이 흐르지 않는 나라…. 이곳은 몽유국, 당신은 꿈속 허황된 제국의 귀비입니다.
다시 한 번 보름달을 마주한 아라, SANC 1/1D2.
윤아라:
기준치: | 70/35/14 |
굴림: | 1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몸은 분명 어떤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을 텁니다. 공포가 숨을 막습니다.
태자…. 아니, 이권은 당신을 대신하여 어떤 환상을 깨부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뒤의 실체가 무엇인지 당신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이권뿐입니다.
하지만 그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너무 많은 진실을 알아 충격에 빠진 머리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그때,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납니다.
아, 이건 신년제의 시시한 불꽃 따위가 아닙니다. 검은 하늘을 뒤덮는 잿빛의 연기, 그리고 그 끝자락을 붙든 흉악한 불길이 보입니다.
불길이 태격(太檄)궁에 번져듭니다.
삽시간에 번진 불이 흉흉히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몸집을 불립니다. 강하게 분 바람 한 토막에 몽유국의 자랑이라던 숲과 들이 한 줌 재로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따금 튀는 불똥이 도망치는 궁인들과 관리들의 소매며 치맛자락에 흔적을 남기고, 만년이나 이 제국의 영광을 지켜왔다던 태격궁의 기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제 몸을 무너트리니, 이 불길이 꺼트리지 못할 영화(榮華)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불이 꺼트리고 있는 것은 당신의 꿈일 뿐입니다.
불을 틈 타 궁궐의 깊숙한 곳까지 들이닥친 사병들은 오랜 세월 이 땅을 다스린 영명제의 깃발을 모조리 뽑아 땅에 던져버리니, 그 위로 까맣게 덮인 발자국이 한 시대의 종말을 소리 없이 알립니다. 벽과 바닥에 깊이 스민 피비린내와 시체가 타며 내는 역한 냄새는 한데 어우러져 이 세계에 다시없을 아비규환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칼과 창이 맞부딪히고, 말달리는 발굽 소리가, 보병들의 갑주가 내는 마찰음이 코앞까지 다가옵니다. 내원의 비빈들은 일찍이 살길을 도모하고 각자 도주를 시도했으나 그들의 생사를 알 수는 없습니다.
기실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꿈속의 이들, 그들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죽는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불길이 향하는 곳으로 걷는 동안, 칼과 불이 당신에게도 스치지만, 이제 현실을 깨달은 당신은 아픔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검도 당신을 꿰뚫지 못하고, 어떤 불도 당신을 태우지 못합니다.
불이 시작된 자리는 당신의 꿈이 깃든 장소, 환휘전.
거센 불을 헤치고 입구에 들어가면, 이권 대신 달갑지 않은 얼굴을 발견합니다. 황제의 총비라는 당신, 이 꿈속의 귀비는 이런 아수라장 가운데서도 도망칠 방법이 없습니다.
황제:어디에 숨어있었는가? 귀비!
실성한 듯 웃음을 그리는 영명제의 입이 크게 찢어집니다. 당신의 손목이 거칠게 끌려 어느새 수갑이 채워집니다.
무심코 당긴 손, 철그렁 소리가 나면 일찍이 이성을 상실한 혼군(昏君) 영명제가 볼품없이 몸을 떨며 당신의 어깨를 움켜잡습니다.
자신의 명운이 다하였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패악질을 부리던 황제는 기어코 끝까지 당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몸을 무거운 철쇄로 한데 묶어 두었습니다.
…그는 이대로 당신을 끌고 갈 참입니다. 아무렴 왕과 함께 묻히는 것이 후궁의 도리라고는 하나, 애써 꾸민 꿈조차 이런 결말이라니.
황제:이대로…,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 아아, 귀비…! 귀비…!
광인의 고함이 당신의 정신을 깨어 놓았습니다. 문득 앞을 바라보던 찰나, 영명제는 당신이 달랠 겨를도 없이 피를 토해냅니다.
그의 배를 뚫고 지난 검날은 당신의 몸이 겨우 닿지 않을 거리에서 동작을 멈췄습니다.
울컥, 한 움큼 토한 피가 바닥을 기던 소매를 적시고 나면 이다지도 초라한 모습으로 황제가 쓰러집니다.
당신의 꿈을 붙들던 홍연이 스러집니다.
탕! 팔에 묶인 사슬이 끊어지면 당신은 자연스레 위를 올려다봅니다.
당신은 지금 피로 몸을 적신 칼의 주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내려다보는 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자야말로 암군을 끌어낸 영웅으로 시대에 기록될 위인이며, 몽유국에 하나뿐인 적통 후계자요 태자입니다.
아니, 그 또한 꿈속의 허상일 뿐입니다.
깨어난 당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다디단 꿈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금, 칼을 손에서 놓고 당신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은 그가, 손을 들어 당신의 낯 위로 튄 선혈을 지워냅니다.
타닥타닥 빨갛게 온 성을 물들인 불길 속에서, 그의 음성은 희미하나 무겁게만 들렸습니다. 촉광같이 흔들리는 그의 눈빛은,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권:…물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꿈이 무너지기 전에. 달이 감춰지기 전에.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기 전에.
이권:…귀비. 나의, 이 사람의 황후가 되시겠습니까.
그는 당신에게 감히 묻고야 맙니다. 처참한 이 꿈, 이제 악몽에 불과한 이 꿈에, 그와 함께 잠들지 않겠느냐고.
윤아라:... ... 태자. (말문이 막혔다. 웃음이 그려지지도 않았다. 지금으로썬 우리가 이어져있단 증거가, 황제의 핏자국 뿐이구나. 그것만이 우리 사이를 잇는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 미지근한 것이. 나를 죽이던 것이. 네가 죽인 것이. ...) 아니, ... (눈을 감으면 꿈이 깨어날까. 그러니 감을 수 없었다. 다만 시선은 멍하니 떨어진다. 몽롱하니 젖어들어가는 것이다.) 권아.* ... ... (당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모든 세계의 법칙마냥 당신을 향해 손을 뻗으면 뛰어오는 심장이 있었으니, 통증이 기어코 당신을 향한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스라질 듯 웃는다. 눈을 휘어 찬란히 미소짓는다.) 네가 보고싶었단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날 좀, ... ... 껴안아주겠습니까? 태자. ... ... ... (우리의 끝이 덧없을 뿐이래도. 이미. 서로가 서로를 향한 '독'이 되었대도.)
이권:(말 없는 시선이 당신을 향했다. 그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당신을 제 품으로 붙잡아 끌어당겼다. 권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핏물은 당신에게도 스며들어 붉은 자국을 남긴다. 단단한 팔이 여린 허리를 감싸안는다. 너무 오래 그리웠던 품이었다. 너무 오래 사랑한 사람이다. 이렇듯 지저분한 미련으로 너를 붙잡을 만큼. 제 존재가 당신을 해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놓아주지 못할 만큼, …그렇게 사랑했다.) ……약조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절절한 음성이었다. 그는 곪아온 죄책감과 당신 향한 애정이 한데 뒤엉켜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인다.) 한낱 이기심으로 당신을 붙잡는 나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떨리는 손이 당신의 뒤통수를 감싸쥔다. 제 어깨 위로 얼굴을 묻도록 너를 가깝게 껴안았다.) 다만, 그리웠다, 아라, 네가…….
윤아라:(그래. 약속은 처음부터 틀렸다. 성립될 수조차 없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아니, 그 전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독이었다. ... 참담함이 눈 앞을 가리나 저를 껴안아오는 당신에게서는 끝없는 애정만이 흘러넘쳤다. 그러니 제게 스미는 것은 피가 아니라, 죄악과 이기가 아니라 다만 사랑일 테니. 끝의 끝에서도 놓치지 못할 애틋함일 테니. ... ... 더는 거부할 수 없어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떨리는 손이 당신의 등을 끌어안으면, 아. 비로소 우리가. ... 마주 본다.) 차라리. ... (당신의 품, 그 어둠 안에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기 전부터라도, 더 일찍 내게 일러주지 그랬어. (이마를 부빗거렸다. 작게 속삭이는 음성이 지독히도 다정하길 바랐다.) 왜 혼자 다 끌어안았어, 권아?
이권:…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어. (조용히 대답하다 당신을 끌어안은 팔에서 천천히 힘을 푼다. 여전한 미련으로 느리게 떨어진다. 조금 쓰라린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던 이권은 이내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엄지가 희미하게 남은 눈물 자국을 부드러이 닦아낸다.) 이 세계는, 네 기억과 생명을 제물로 만들어진 꿈이다. …그러니 이 꿈이 끝나면 너는 나를 전부 잊고 살아가게 돼. (그는 사랑스런 연인의 낯을 어루만지다 참담한 심정으로 중얼인다. 아픈 미소를 지었다.) 내 사랑이 이리도 비겁하여 미안하다. …널 놓을 자신이 없었어.
(아니, 사실은 지금도. 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실의 당신이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 거짓된 세계가 무너지고 나면 이권의 영혼은 영원히 소멸할 것이다.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겠지, 지금 이 부드러운 뺨도, 지독히 다정한 목소리도, 저를 뚜렷하게 바라보는 시선조차 닿을 수 없는 무無가 되어 사라지겠지….) 아라. (등 뒤로 불그스름한 불꽃이 튀어 오른다. 번져가는 불빛에 사늘한 그림자가 이권의 낯 위로 드리웠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은 망설임과 미련을 담고서 너를 바라본다. 일렁이는 역광 속에서 그는 입술을 떼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이 사람과 곧 끝나버릴 영원을 약속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청하는 음성이 비통하다.) 나와 함께… 이 잔인한 꿈의 끝을 마주하지 않겠습니까.
윤아라:내 기억, 생명. 그 모든 것을 앗아갔음에도. ... (너를 향한 사랑만큼은 빼앗아가지 못했나보지. 떨어지고서야 남은 자국을 닦아내는 당신, 뺨을 감싸쥐는 것에 가만 얼굴을 기댔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그 손을 붙잡았다.) 하니 내가 이곳에서 깨어날 이유라곤 하나 존재하지 않는데. (비겁? 이기? 그런 단어를 붙일 것이었다면 현실의 자신에게 붙여야지 않았나. 죽었다고. 죽은 자는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아직까지 발치에 선명했는데. 마른 입술을 뗐다. 왜 이리,) ... 겁이 많아졌습니까? (사방이 불길이었다. 옷에 스며든 피는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는데 주변의 열기는 숨을 막히게 했다. 손을 떼어 당신의 한 뺨을 어루만지다가, 아라가 환히 웃음짓기 시작했다. 역광을 진 당신에게서 어둠이 제게 드리우니 조금이나마 숨이 트인다. 고개를 살짝 떨구다가, 다시 치켜들었다가. 곧, ... ...)
(아라가 당신에게 안겨들었다.)
(목을 껴안아내며 불씨 튀는 것을 마주한다. 맞닿은 가슴으로부터 뛰는 심장은 대체 누구의 것이었나. 웃음이 터져나왔다. 막을 방법을 하나 알 수가 없어서, 아라는. ... ...) 왜 이리 당당하게 이야기를 못해, 나의 태자. 나의, 애정하는, 나의, ... 사랑하는, (권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날, 네게 안겨보기라도 할 것을 그랬다. 통증이라 단언하지 말고 사랑인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인정할 걸 그랬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사랑스러움으로 행복으로 가득 찼었으나 끝내 이렇게, 정녕 아픈 것으로 변질될 것을 알았더라면 더 빨리 너를 안아줄 것을 그랬다. 그랬어야 했다. 죽은 이가 둘, 산 자가 하나. 무너지는 세계 한가운데에 우리가 숨 쉬고 있으니 이제. 다 무無로 돌아갈 차례이리라. 원통함도 슬픔도 죄다 묻어버리고서 그저 하고픈 말이 있다면.) 사랑합니다. (털어낼 미련이 있다면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영원의 전부터, 영원의 후까지 평생. ... (두려움 없이 끝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다.) 그리합니다.
이권:(제 품으로 안겨드는 무게에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그 여린 몸을 간절하게 끌어안는다. 아라. 꿈에서도 잊지 못할 체온. 영혼에 아로새겨 기억할 감각. 이 헛된 미몽의 유일한 확신. 벅찬 환희와 비참한 절망이 치닫는다.) ………조금은…… 네가 거절하기를 바랐을지 몰라. (목 메인 음성으로 간신히 입술을 달싹인다. 목소리가 바짝 말라붙어 엉망이다. 등 뒤에서 뜨겁게 지펴 오르는 공기가 느껴졌으나, 더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이제는 무엇도 그를 해칠 수 없었다. 그의 기쁨과 공포는 모두 당신이 가졌기에.)
(사랑이라 이름붙일 자격 없는 미련으로, 죄악으로, 네 손을 붙잡아 기꺼이 자신의 나락까지 이끌었으니, 당신은 결국 저로 인해 죽는 셈이다. 그 사실이 못내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그를 기쁘게 했다. 심장 위로 뻐근한 애정이 머문다. 나의 귀비. 나의 황후. 죽음까지 함께할 정인情人….) 사랑해, 아라. (죄를 토로하는 심정으로 네게 사랑을 속삭였다. 스스로 뱉은 고백에 깊게 절망하며 너를 껴안은 팔에 힘을 더한다.) 죽음이 오기까지 네 곁에 있겠다. 너도… 그렇게 해. 떠나지 마라.
이 영원 속에 살자.
이것이 서로를 해치는 죄악이라 해도……
(네 뺨을 감싸올려 입술을 겹친다. 무너지는 태격궁의 불꽃을 뒤로 한 채 애틋하게 입맞추었다.)
쿵,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납니다. 대들보까지 불꽃이 튀었던가요.
그래도 불을 끄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장병들이 물을 뿌리면 꺼질 불이니까요.
하지만 한 번 무너진 꿈은 어떻게 해야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한 번 흩어진 인연은 어떻게 해야 다시 묶을 수 있던가요.
이제 가진 것이라곤 고작 한 줌 남은 생명이 전부인데요.
…허나 이것이면 충분할 겁니다. 당신은 남은 생을 전부 바쳐, 우리 두 사람의 연을 잇기로 합니다.
이 헛된 꿈에 사로잡혀 곧 끝날 영원 속에 살기로 했습니다.
삶, 그 귀하디 귀한 것을 사랑 앞에 내던지고 살겠지요.
한 철 아름다운 봄 꽃으로 머물다, 그렇게, 아득한 죽음 속에 잠들 것입니다.
푸른 달과 깊은 숲은 여전합니다. 텅 빈 강정 같은, 불이 붙은 궁궐 아래 오로지 하나의 진심만이 여전합니다.
END 3
몽중상심(夢中相尋)
…당신은 느리게, 느리게 주문을 외웁니다. 천천히 표백되는 기억이 안타까워, 아주 조금은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라.
오늘 이 손을 놓으면, 우리는 다시금 꿈에 갇히게 됩니다. 다시 갇힌 꿈에서, 우리는 다시 헤매게 됩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당신은 고통받아 왔습니다. 기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꿈을 꾸어서라도 그의 곁에 서지 않으면 당신은 살 수가 없었겠죠.
그렇지 않으면 아라, 당신이 어떻게 이 가짜 궁궐에, 전부 거짓된 꿈을 꾸며서라도 그를 끌어 들였겠습니까?
당신은 소원합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우리, 다만 꿈일 뿐이라도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달 아래 숨쉬며 서로에 기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한 심원이 마음을 찌르던가요. 앞을 바라보면, 그 역시 애처로운 표정으로 당신을 향해 웃어 보입니다.
...
영경(永景) 1년.
오늘은 폭군이던 부황을 살해한 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날입니다. 그의 연호는 영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관례, 그의 옆에 설 사람은 아라, 바로 당신입니다.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백성들의 사랑을 받지요.
폭군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던 귀비를 맞아들인 영경제의 행보는 파격적이라 여러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래도 대다수 사람들은 당신과 황제의 혼사를 축복합니다.
자, 이곳은 언제나 보름달이 뜨는 나라,
언제나 수풀이 푸르른 나라,
꿈과 같은 선경,
몽유국입니다.
이권 로스트
아라 ?
생존 보상 없음
당신은 대제국인 몽유국의 황후가 됩니다. 이 제국에 당신보다 고귀한 사람은 황제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기억을 잃은 당신은 즐겁게 꿈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아니, 이제는 이쪽이 당신의 현실이던가요? 황제, 이권은 당신에게 온정을 베풀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어쩐지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역사상 어떤 황제와 황후도 이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75 일째, 당신의 곁에 누워있던 젊은 황제는 돌연 붕어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멈춘 심장, 당신은 현실에 돌아올 것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렇네요. 가장 아름다웠던 한바탕 꿈을 대가로, 두 사람은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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